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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Aug 11. 2022

경직된 생각에 도수치료를!

<배드 럭 뱅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뻣뻣한 건 허리만이 아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 따르면, 희극적인 것의 성격 중 하나는 경직성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가 사랑스러운 웃음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바로 그 뻣뻣함에 있다. 사실만을 말하는 우영우 변호사가 담당 판사와 함께 현장 검증에 나섰다. 마침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운 상황. 판사가 넘어졌다. 주심에게 잘 보이려는 변호사가 재빨리 다가가 말한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저는 오늘 운동화를 신고 왔습니다.”


이러한 경직성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겐 경직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은 자기가 전에 앉았던 곳에 착석한다. 지정석이 아님에도 말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젊었을 적에 들었던 음악을 평생 고집한다고 한다. 사적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경직성을 찾을 수 있다. 상당수의 유권자가 청년기에 지지했던 정당을 일평생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논문이 있을 정도다.


역시 베르그송에 의하면, 생명은 유연하고,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이라는데 왜 우리는 경직되었을까. 뻣뻣한 나는 생각했던 대로 생각한다. 아니, 한때 했던 생각이란 게 몸에 스며들어, 어느새 생각을 하지 않고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했던 대로 한다. 이러한 경향은 물론 생존에는 유리할 것이다. 아기처럼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인다면 인간은 멸종했을 것이다. 경이에 빠져있는 동안 적에게 잡아먹혔을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사물을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 환원한다. 편안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는 데 노고를 들이지 않음으로써 에너지를 절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여타 동물과 다른 면이 있다. 생존의 차원만이 아니라 실존의 차원도 영위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이고 후자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실존을 내팽개치고 생존에 올인한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꼰대는 삼라만상을 자기가 아는 대로 풀어낸다. 본인이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살아내는 젊은이의 고민도 꼰대에겐 새롭지 않다. 꼰대는 최소한의 에너지로 생활을 한다. 힘이 남는다. 그래서 여분의 기력을 오지랖에 투자할 수 있다. 이러한 행태가 흉측하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꼰대는 서글픈 존재이기도 하다. 세상사 다 아는 것이니, 삶이 얼마나 무료하고 황량하겠는가.


서글픔에 빠진 서정적인 꼰대는 그나마 괜찮다. 해악이 자신에게만 머물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해악을 내뿜는 부류도 있다. 바로 적극적 꼰대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정당화한다. 나쁘거나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지기 싫기 때문에. 그래서 적극적 꼰대는, 자신의 재미없는 삶이, 본인 탓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논리임을 입증하려 한다. 적극적 꼰대는 새롭게 피어나는 싹을 꺾으려 든다. 기존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조롱한다. 혹은 눈과 귀를 틀어막고 부정한다. 물리학자 막스 프랑크는 이런 군상을 많이 만났는지 다음과 같이 체념했다. “[새로운]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거나 감화시키지 않는다. 그보다는 반대자들이 다 죽고 나서 새로운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때 비로소 승리한다.”


도입 : 경직된 머리에 도수치료를



<배드 럭 뱅잉>은 나와 같은 꼰대들의 필라테스 강사 또는 물리치료사를 자처한다. 뻣뻣한 생각의 다리를 찢는다. 경직된 생각에 도수치료를 가한다. 라두 주데 감독은 노련하다. 담배에 중독된 이에게 점잖은 금연 제안이 먹히지 않듯이, 생각하지 않음에 중독된 나 같은 관객에게 어지간한 걸로는 충격을 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 없이 다짜고짜 남녀의 성기를 보여주는 걸로 시작된다. 작품의 첫 5분(10분? 충격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모르겠다)에는 포르노와 다르지 않은 수위의 노출이 담긴다. 그때 나는 분명히 들었다. 내 경직된 두뇌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는 것을. 거대한 화면으로, 모르는 이들과 함께 포르노 같은 영상을 마주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우두둑 소리와 함께 그동안의 관람 습관이 깨졌다. 새로운 상황이고 새롭게 봐야 한다. 생각이란 걸 해야 한다.



‘1부. 일방통행’ : 우리의 상황



에미(카티아 파스카리우)는 남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것이 첫 5분(10분?)이다. 충격의 시간이 지나고, 분홍색 화면이 나타난다. 몇몇 글이 적혀있다. 글귀는 1부, ‘일방통행’ 편의 시작을 알린다. 챕터명 아래에 다음과 같은 문구도 있다. 세계는 무너지고 있고, 바닥에는 노쇠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인간은 그걸 모른다. 감독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적극적 꼰대들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일방통행’이란 말과 어울리지 않게 에미는 여기저기를 배회한다. 꽃을 사고, 낡고 파손된 도로 위를 거닐며, 무단횡단을 하는 식이다. 몇 분을 다녔을까. 에미가 남편과 통화를 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부부가 찍은 영상이 유출됐음을 알게 된다. 한국 영화 <경아의 딸>과 유사한 설정인데, 에미는 같은 처지인 연수(하윤경)와는 다르게 담담해 보인다. 에미가 1부의 시작에서 꽃을 산 건 교장의 집에 가기 위함이었다. 교장은 영상과 관련하여 학부모 회의가 소집될 거라고 말한다. 교장의 아파트에서 나온 에미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하염없이 걷는다.


처음에 카메라는 에미만을 응시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을 기웃댄다. 초반엔 고정된 위치에서 에미를 좇아 패닝 하던 카메라가, 어느 사이엔가 틸트 업하여 에미가 없는 풍경을 담더니, 나중에는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코로나가 횡행하는 시기이기에 시민들이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다. 바이러스로 뒤덮인 그곳에는 격투기 체육관도 있다. 도장명은 ‘루마니아.’ 감독에게는 루마니아인 혹은 현대인이 화가 난 싸움꾼처럼 보이나 보다.


그래서인지 1부에 나오는 인물 중 다수가 분노에 차있다. 어떤 사람은 차로 사람을 밀어버린다! 인도에 불법 주차한 이에게 에미가 항의하자, 남성은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성희롱을 퍼 붙는다. 마트에선 맥주 한 병 살 돈이 없는 손님이 캐셔에게 하소연을 늘어놓는데, 그 뒤에 있는 부자처럼 보이는 이가 짜증에 차서 화를 낸다. 슈퍼맨 복장의 다른 고객이 만류해보기도 하지만, 부유해 보이는 여성은 그칠 줄을 모른다.



마트 밖에서 에미는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노인과 마주치기도 하고, 약국에 가서 울적한 기분을 달랠 약을 사기도 한다. 기분전환을 위해 책방에도 가보고, 책을 들고 카페에 가기도 한다. 그 와중에 카메라는 부서진 보도, 무너질 것만 같은 건물, 쇼핑센터의 어지러운 표지판, 다국적 기업의 광고물, 기업 광고 같은 정당 홍보물을 필름에 새긴다.


카페에서 카메라는 에미가 아니라 그녀 뒤에 있는 대학생에게 관심을 둔다. 학생 몇몇이 일본 카미카제 특공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카미카제는 사실 자발적인 조직이 아니었고, 당시 정부가 쓸모없다 여긴 문과 학생들을 소집하여 강제로 구성한 단체라는 것이다. 경제학과 학생이 자기 정도면 소집되지 않을 거라 말하자, 다른 학생이 컴퓨터 공학 정도는 되어야 살 수 있을 거라고 답한다.


관객은 의아하다. 포르노 같은 영상을 보여주다가, 일방통행이라더니 목적지도 없는 듯한 산책을 긴 시간 상영하는데, 그 와중에 카메라는 제멋대로 이것저것을 바라보니 말이다. 에미가 시장에 들어설 때, 부쿠레슈티의 폐허처럼, 작품과 관객을 구분하는 ‘제4의 벽’도 무너진다. 에미가 군중 속으로 사라질 때 할머니가 카메라를 직시하고 쓰다듬으며 음탕한 말을 내뱉는다. “꽃에 물 좀 줄라우?” (아마 좀 더 직설적인 말 같다. 영어로는 “eat my cunt”라 번역되었다니까.)


카메라는 이제 <배드 럭 뱅잉> 밖에서 에미와 다른 인물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다. 작품에 속한, 작품 안에서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어떤 존재이다. 관조자는 세속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하나의 주제에 집중할 수 있다. 가령, ‘사생활 문제로 교사를 처벌해도 되는가’, ‘외설은 무엇인가’와 같은 이슈 말이다.


반면 경기에 속한, 경기에 참여한 선수는 경기장에 있는 모든 것에 신경 써야 한다. 루마니아 또는 현대라는 경기장에는 화가 난 이, 싸우는 자, 빈민, 우울증 환자, 인문계에 대한 괄시 풍조, 무차별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글로벌 대기업, 프로파간다를 뿜어대는 정당이 뛰어다닌다. 경기장은 난개발 되었고, 낡았으며, 너저분하다. 라두 주데의 카메라는 초월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관조하지 않고, 코로나가 창궐하는 현실의 한복판에 서 있는 참가자를 자처한다.


무얼 말하려는 걸까. 에미의 문제는 사실 이 모든 것과 얽혀있다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중요한 문제가 도처에 널렸는데, 왜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 눈감고 남의 알몸에만 눈을 부릅뜨는지를 묻는 걸까? 1부의 끝 부분에는 도시명과 같은 상호의 극장이 나온다, 극장의 출입문 윗부분에는 신의 형상을 한 장식물이 있다. 거기에 부쿠레슈티라는 영화를 바라보는 신들이 있다. 카메라는 부쿠레슈티의 시민이 되었고, 우리 관객은 신이 되었다.


(일방통행이라면서 목표도 없이 여기저기로 흩뿌려지는 것이 또 있다. 발터 벤야민이 쓴 《일방통행로》이다. 벤야민이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한 생각을 담은 책이다. 좋게 얘기하면 심오하고, 솔직히 말하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가득하다. 가령, 벤야민은 아크등을 보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단다.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벤야민은 여기에서 하나의 내용을 전달하려는 것 같지 않고, 하나의 형식을 전하려는 것 같다. 주변 것들을 익숙한 방식으로 흘려보낼 게 아니라 낯선 관점에서 바라볼 것. 다시 말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눈앞의 것에 집중하고 관찰하며 스스로 생각할 것.)


‘2.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 : 상황의 요인



2부는 내러티브에서 벗어난다. 순전히 에미의 이야기와 관련해서라면 2부 전체를 도려내도 될 것이지만 그렇다면 <배드 럭 뱅잉>은 지금과 같은 명작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러티브란 각각의 점을 인과관계로 이은 선을 의미한다. 점과 점을 선으로 잇는 과정에서, 우리는 금세 해왔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곤 한다. 그리고 3부에 나오는 말처럼, 최악은 생각하는 척하다가 금세 익숙한 관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애초에 생각 자체를 안 했으면 언젠가는 생각이란 것을 해야 할 텐데, 하며 찝찝함이라도 느끼겠지만, 생각을 조금 하다 마는 것은 뭔가를 했다는 만족에 빠져서, 언젠가 도달할 수 있을 진지한 사유의 가능성을 막기 때문이다. 감독이 2부에서 제시하는 건, 루마니아 또는 현대가 왜 1부와 같은 상황에 처했는지를 분석하는 도구이다. a부터 z까지, 알파벳순으로 몇몇 개념을 살핀다. 가령, ‘식민지’라는 단어가 나오면 이와 관련된 화면이 나오는 식이다. 어떤 건 사진이고, 어떤 건 자투리 필름을 이어 붙인 것이다. 자막으로는 개념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원주민 여성의 몸을 희롱하는 백인 침략자, 파시즘을 찬양하며 노래 부르는 정교회의 성직자, 나치를 찬양하는 인파, 부모에 의해 정치 집회에 강제 동원된 아이들처럼, 정치와 종교의 어두운 면이 다뤄지기도 한다. 성적인 내용이 언급되기도 한다. 예컨대, ‘오럴 섹스’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는 키워드라는 것(루마니아인은 디테일한가 보다). 범람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담은 영상도 있고, 프랑스혁명이나 루마니아 혁명은 이제 도넛 상자나 와인 라벨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는 자본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클로즈업’ 키워드에서 감독은 2부가 나머지 챕터와 연결되지 않음을 다시금 강조한다. 에미 아니 에미 역을 맡은 카티아 파스카리우가 거울을 들고 있다. 에미의 상황과는 상관이 없는 클로즈업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여기서 카티아는 극 중 캐릭터이기를 그치고, 클로즈업을 설명하는 교보재로 자리한다.


인상적인 개념 중 하나는 ‘시네마’이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인 일화가 설명된다. 메두사는 너무도 흉측하게 생겨서,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은 모두 돌이 되었다고 한다. 페르세우스는 여신 아테나에게 얻은 방패를 활용하여 메두사를 직접 보지 않고, 방패에 비친 반영으로 그를 제거했다. 주데가 볼 때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실재는 끔찍하지만 스크린이라는 방패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실로 그렇다. 게다가 메두사를 볼 때보다 방패를 볼 때, 실재를 볼 때보다 예술을 볼 때, 우리는 즐거움을 느낀다. 이따금씩 현명해지기도 한다. 이춘재의 범행은 참혹할 따름이지만 〈살인의 추억〉에는 어떠한 쾌감과 깨달음이 동반된다. 현실의 비참은 참담할 따름이지만 〈기생충〉에는 어떠한 자극과 통찰이 수반된다. 거대한 불의에는 눈감으면서 약자에 대한 배려에는 공정하지 않다고 분노하는 이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모술수’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진 않는다. 왜 그럴까. 현실의 압박감이 모방된 세계에서는 완화되기에 정황을 더 정확히 볼 수 있는 걸까. 역사보다 문학에서, 현실보다 가상에서, 실재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라두 주데 역시 이리 생각하는 듯하다. ‘역사’ 개념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소설과 달리 역사와 인생에선 교훈이나 행복을 담은 의의가 없다. 역사를 들여다볼수록 인류에 대한 환멸과 우울한 전망만이 생겨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이란 쓰레기로 만든 최상급의 요리이고, 범죄로 빚은 미덕이며, 추(醜)에서 나온 미(美)이다. 실제로 일어난 형편없는 일들을 예술로 바라볼 수 있다. 그것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주데에게 예술이란 현실을 배반하는 아름다움이며 동시에 현실을 교정하는 페르세우스의 칼일 것이다. 이 모든 걸 위해서 예술가는 메두사와 만나야 할 것이다. 얼굴을 보진 않을지라도.


‘3부. 실천과 빈정거림(시트콤)’ : 상황에 응답함 



다시 에미 이야기다. 학부모 회의가 소집되었다. 카메라는 1부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시국이라는 현실 속에 자리한다. 2부식으로 표현하자면 카메라는 방패처럼 현실을 비추고 있다. 회의 참석자는 교장과 학교 관계자로부터 마스크를 제대로 쓸 것을 주문받고, 체온도 잰다. 회의 도중에도 참석자들은 마스크를 올려 쓸 것을 요구받는다. 표정을 전달해야 하기에, 코로나가 유행할 때 만들어진 거의 모든 영화에서 인물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허나 <배드 럭 뱅잉>은 현실을 비추고 있다. 관객은 배우의 얼굴 전체를 보지 못하고 마스크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최근 몇 년 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시트콤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3부는 희극적이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자면, 경직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학부모 회의는 흡사 누구의 생각이 더 뻣뻣한지를 겨루는 경연장 같다. 혐오의 전시장 같기도 하다. 명문 학교에 자녀를 보냈다는 자부심에 차 있는 부모들이 모였다. 제복 차림의 남자도 있고, “옥스포드”와 같은 교육을 기대했다는 여성도 있다. 항공 조종사도 있고,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때의 구호인 ‘숨 막혀요(I can’t breathe)‘가 새겨진 마스크를 쓴 성직자도 있다. 회의 참석자들은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쓰고 있다.



회의는 시작부터 엉망이다. 참가자들은 우선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며 에미의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생한다. 에미 옆에 있는 태블릿 PC에서 영화 시작의 5분(10분?)이 다시금 흐른다. 거리두기가 무시되고, 사람들이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다. “상영 중에 핸드폰은 끄세요”라는 말로써 감독은, 회의 참석자에 영화 관객의 모습을 덧씌운다. 관객이 관음증자라는 걸까. 군복을 입은 중년 남성은 바나나를 먹으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이 정도면 됐다는 누군가의 말에 다른 남성은 “해피엔딩은 봐야지!”라며 끝까지 시청을 고집한다. 이 정도면 회의가 아니라 관음증의 현장이고, 종교 재판장이란 것을 관객은 알게 된다.


에미는 합리적인 말로 자신을 변호한다.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건 죄가 아니고, 성인용 사이트에 청소년이 접속하는 걸 관리해야 하는 주체는 부모라는 것. 또 남편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걸로 교사직에서 쫓겨나는 건 부당하다는 것. 엉망진창의 응답이 이어진다. 저런 식으로 사랑을 나누는 건 창녀나 할 짓이다! 과녁은 어느새 영상에서 에미 자체가 되었다. 에미가 학생들을 공부시키지 않는다는 항의도 나온다. 에미는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를 언급하며, 성적보다 더 중요한 건 스스로 생각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을 뿐이라 항변한다.


어차피 논리가 아니라 분풀이에 관심이 있었다는 듯이 회의장은 난장판이 된다. 누군가 소리친다. 유대인이다! 이제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편견에 들어맞지 않는 에미, 루마니아, 현대 사회를 규탄한다. 코로나 방역에 대한 불평, 동성애를 우호적으로 보는 분위기에 대한 불만, 코로나와 관련된 음모론 등이 뒤섞인다.


참석자 중 한 명이 에미를 변호한다. 지금 이 꼴은 교사의 옷 아래가 알몸이라는 걸 공격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고정관념[대타자]을 되풀이하는 존재라 주장한 자크 라캉의 농담 중 하나[라고 지젝이 말했]다.) 또 코로나에는 교회의 성수가 직방이라는 누군가의 말에도 반박한다. 그런 건 과학이 아니라는 것, 또 과학조차도 패러다임에 따라 바뀌곤 하니 우리가 능동적으로 따지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단한 진보 지식인 납셨네.” 에미와 남성의 제안, 즉 스스로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은 한마디로 일축된다. 에미는 무식한 말일수록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질 거라며 자조한다. 그녀는 자신의 전공인 역사 지식을 통해 항변하지만, 학부모들은 그런 게 뭐 중요하냐며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루마니아 만세, 동성애자를 박멸하자, 좌파를 때려잡자 등등의 말이다.

   


'세 가지 가능한 결말' : 생각해봐요, 뭐라 응답할지



마지막 챕터다. 세 가지 결론이 제시된다. 첫 번째는 ‘이 영화는 그냥 농담이었다.’ 민주주의에서 전가의 보도로 여겨지는 다수결이 등장한다. 에미는 간신히 학교에 남을 수 있게 됐다. 이는 말 그대로 실없는 결론이다. 저주의 낙인을 뒤집어쓴 에미는 금세 다시 종교 재판장에 회부될 것이다. 어떤 명목으로든 간에 말이다. 에미의 변론은 허공으로 사라졌고 “무식한 말”만이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진” 상황이다. 두 번째는 ‘잠시, 아주 잠시 당신의 시간을 빼앗았다.’ 다수결에 의해 에미는 교사직을 내려놔야 한다. 지쳤는지 별다른 말없이 회의장을 떠난다.


이제 마지막 결론이다. 바로, ‘이 영화는 그냥 농담이며 여기서 끝이 난다.’ 학부모의 표결이 에미의 사직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두 번째 가능세계와 달리 세 번째 세계에서 에미는 그러한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숱한 개소리에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에미는 결론으로 인해 끓는점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빵 하고 터지며, 원더우먼이 된다! 스파이더맨처럼 그물을 쏘아 학부모를 잡아들이고, 거대한 딜도로 그들 하나하나의 입을 쑤신다! 아직 차례가 오지 않은 학부모 둘이 속삭인다. 유대인 맞잖아!


앞선 1, 2부에서 무수한 단서가 나왔기에, 관객은 마음껏 해석의 가짓수를 늘릴 수 있다. ‘오럴 섹스’는 루마니아인이 가장 많이 검색한 키워드랬는데, 그 다중의 관심을 편견을 엿 먹이는 데 써보자는 걸까? ‘예수’가 (화면에 보이는 이러한) 주먹을 가졌다면 아마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을 거라 했는데, 선입견의 희생자가 되지 말고 정의의 딜도를 휘두르라는 걸까? 1부에서 글로벌 대기업의 간판을 많이 보여줬는데, 결국 히어로는 미국이라는 걸까? 아니면, 1부에서 문과는 쓸모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역시 문과와 예체능 계열은 <배드 럭 뱅잉>처럼 이상한 거나 만든다는 걸까?


라두 주데는 경직된 사고를 박살내고, 생각의 도구들을 제시하고, 생각하기 좋은 여건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낸다. 생각할 것을 권하는 이는 항상 여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생각의 내용까지 제안한다면 이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나 선전선동 또는 세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생각하는 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무너지는 세계에, 분노에 찬 우리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 다른 걸 듣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찌할 것인가. 감독은 방패가 되어서 이 모든 걸 비추고 있다. 메두사를 벨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패를 볼 것인가. 그도 아니면 스스로 메두사와 접할 것인가. 어떤 결정이든 필요한 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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