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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Mar 24. 2022

연가시와 관습의 공통점

<스펜서>

여왕도 피할 수 없는 것



관습은 무엇인가. 사회의 습관이다. 습관은 무엇인가. 제2의 천성(nature)이다. 천성은 무엇인가. 자연(nature)이다. 그렇게 관습은 사회의 자연이 된다.


자연은 논쟁을 벗어난다. 누군가의 찬반 여부와 무관하게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반면 관습은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태 그랬다는 것이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걸로 이어질 수 없다. 긴 시간 이어져 왔다는 게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노력한다. 관습 역시 마찬가지다. 관습의 생존 전략은 자신을 자연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습관은 바꿀 수 있는 것이건만, 관습은 누군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여왕이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 별장에 들어서려는 순간, 안전 관리 책임자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은 몸무게를 재야 한다며 그를 가로막는다. 왜 파티 전에 무게를 재야 하나요? 전통입니다. 어차피 몸의 반이 장신구예요. 원래 재야 하는 겁니다.


이때 소령은 본래 그런 것으로 관습을 정의한다. 관습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가 반복해서 하는 말은 전통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 하긴, 자연에 예외가 있던가. 몸무게를 재는 전통은 분명 누군가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자연이 되었다. 여왕조차도 이를 피할 순 없다. 여왕이라고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어디에 있는 거죠?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라고, 니체가 말했다. 그렇다면 단 한순간도 자기를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일까. 왕과 왕족이다. 왕세자비인 다이애나도 자기를 위한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되었다. 정해진 대로만 10년을 살아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지 못한다. 감독 파블로 라라인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밀양>의 신애처럼 다이애나 역시 길을 잃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지도를 보고, 이쪽저쪽을 달려도, 다이애나는 방향을 가늠하지 못한다. 그는 신애보다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다. 모두가 그를 주목/감시하기 때문이다. 위치를 묻기 위해 허름한 식당에 들어간 다이애나. 손님 전부가 그를 바라본다. 그가 묻는다. “여기가 어디죠(Where am I)?” 나는 어디에 있는 거죠?


카메라는 부감으로, 완벽하게 좌우 대칭을 이룬, 왕실의 별장 가는 길을 비춘다. 영화의 제목이자 다이애나의 성인 ‘스펜서’가 오프닝 크레디트의 형태로 화면에 새겨진다. 길을 잃은 다이애나 스펜서. 숨 쉴 틈 하나 없는, 견고하게 짜인 노선에 그의 이름이 갇혀있다. 즉, 다이애나는 관습과 전통에 감금되었다.


아침 식사 30분 전, 20분 전, 10분 전, 모든 이벤트마다 호출이 있다. 아침 식사 때, 산책 때, 점심 식사 때, 티타임 때, 모든 행사마다 입어야 하는 옷이 정해져 있다. 옷 입는 걸 도와주는 관리인에게 한 말이 삽시간에 별장 전체에 퍼진다. 모든 게 결정되어 있다는 압박감에 다이애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한다. 다이애나의 심정 때문일까. 수도꼭지마저 사람의 눈처럼 생겼다. 그를 감시하는 눈과 닮았다.


좋은 옷, 맛있는 음식, 많은 돈, 왕실의 명예를 포기하면 될 일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다. 왕실에서 나오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용기를 내면 안정된 발판을 잠시 잃지만, 용기를 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키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이애나를 독려할 이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관습의 위력을 고려하지 않은 제언이다.


연가시와 관습의 전략



관습은 외부에서 침투되는데 그치지 않는다. 금세 내부를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해대기 때문이다. 관습은 기생충 연가시와 유사하다. 연가시는 육상곤충의 배 안에서 성장한다. 연가시는 일정한 때가 되면 숙주를 조종하여 물가로 이동시킨다. 연가시에 지배된 곤충은 수영을 할 수 없음에도 물에 뛰어든다. 말 그대로 자살하는 것이다. 뱃속 가득한 연가시를 물에 낳으며 곤충은 죽는다. 번식에 성공한 연가시는 곧 다른 곤충의 배로 침윤할 것이다.


존비어 체계로, 관습과 연가시의 닮은 점을 살필 수 있다. 신생아에게 한국어의 높임말 전통이 주입된다. 외부에서 온 시스템이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를 장악한다. 몇 년 동안 존비어를 구사한 사람은 어느새 세상을 위와 아래로 구분한다. “너 몇 살이야? 내가 너보다 형이야.” “지나고 보면 어른 말이 다 맞아.” 즉, 한 개인에게 침입한 존비어 체계는 이내 그를 지배하고, 존비어에 통제되는 사람은, 세상을 존비어에 맞게끔 만들어간다. 위아래로 구분된 세계에서 존비어는 더 잘 유통될 것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건 공동체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공동체에 존재한다는 건 집단의 관습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니, 다이애나와 우리 모두는 결국 관습의 숙주가 되어서, 관습의 번영에 이바지할 수밖에 없는 걸까. 더욱이 관습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게 아니라 마치 자연인양 굴고 있다. 태풍에 반대하는 게 우스운 것처럼 관습에 반대하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결국 인생을 관습에 바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걸까.


사랑, 충격, 웃음, 기적



가끔씩 기적이 일어난다. 다이애나의 드레서 매기(샐리 호킨스)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 충격, 웃음이 피어날 때가 있다. 그리고 사랑과 충격과 웃음은 길을 잃었을 때 마주하는 것이다. 타이트한 업무 스케줄에서 사랑이 꽃피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일상을 정지시키며 연인이 떠오른다. 통상적인 일에서 충격을 받는 게 아니라 알지 못하는 일에서 충격을 받는다. 진부함에서 웃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예상 못했던 것을 보고 우리는 웃는다.


다이애나는 길을 잃은 와중에, 관습의 왕국에 거주하기 전의 자기를 본다. 유년기를 보낸 곳에서 허수아비를 본 다이애나. 허수아비가 아버지의 낡은 옷을 걸치고 있다. 그는 낡은 옷을 가지고 온다. 다이애나 이전의 스펜서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스펜서는 왕실의 관습에 짓눌리기 전의 자신이다.


111분 동안 영화는 다이애나를 숙주로 삼으려는 관습과 스스로를 지키려는 다이애나의 갈등을 보여준다. 전장은 다이애나의 내면이다. 관습은 연가시처럼 내부로 들어와 자신이 기생하는 생물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하여 자해를 하기도 하고, 기생충에 통째로 삶을 넘기지 않기 위하여 자살을 꿈꾸기도 하겠지만, 결국 잘 해낼 것이다.


촬영 감독 클레르 마통은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과거만이 존재하는 왕실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 화질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에도 햇볕이 드는 때가 있다. 다이애나가 매기와 재회하는 장면이다. 스펜서가 매기를 통해,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그리게 되는 광경이다.


음악 감독 조니 그린우드는 또다시 해낸다. <파워 오브 도그> 이어서 인물의 심리를 음향으로 옮기는  성공하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에 재즈를 섞는 것으로, 전통이란 틀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다이애나의 분투를 음악으로 구현한다. 영화 내내 흐르던 고전 음악이 아닌 팝을 트는 것으로, 왕실에서 벗어나는 길이 자유를 향한 여정임을 들려준다. 그리고 다시금 클래식 음악을 재생하는 것으로, 인간이 선택할  있는  어떤 관습에서 생활하느, 모든 관습에서 떠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틴 스튜어트. <스펜서>의 모든 숏에서, 그는 다이애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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