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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Mar 16. 2022

분노와 욕망

<레벤느망>

인스타그램의 사진은 대개 답답한 인상을 준다. ‘인스타그래머블’(인스타그램에 올릴 법한, instagrammable)이라는 말처럼, 그곳의 이미지는 대체로 비슷하다. 어떤 규칙에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정방형의 1:1 비례도 한몫한다. 견고하게 짜여 그 자체로 완성된 것 같은 정사각형은 어떠한 변화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다.



<레벤느망>에 나오는 안(안나마리아 바르토로메이)의 세계도 비슷하다. 주변 사람은 그에게 전공을 묻지 않는다. 여자라면 당연히 문학이겠지, 하는 상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의 전공은 문학이다. 숨 막히는 현실을 피해 문학으로 온 걸까 아니면 숨 막히는 현실 때문에 문학으로 온 걸까. 계기가 무엇이든 안은 여기서도 자유롭지 않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만든, 이미 완성된, 따라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라틴어 명사의 격변화를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 오드리 디완은 안이 처한 완고한 현실을 카메라에 이식한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1.37:1의 비율 안에 주인공을 담는다. 너무도 안정적이라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을 법한 정사각형에 안이 갇혔다.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상영 시간조차 완성을 연상시키는 100분이다.) 안 그래도 비좁은 화면인데 카메라는 안을 클로즈업으로 바라본다. 그 결과 관객은 영화의 거의 모든 숏에서 안만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순간에 안은 홀로 문제를 짊어진다. 시간은 무심하여서, 협소한 곳에 고립된 안을 재촉해댄다. 3주 차, 4주 차, 5주 차, 시간의 흐름이 계속해서 자막의 형태로 화면 정중앙에 박힌다. 마치 낙인처럼 말이다.


68 혁명 이전의 프랑스는 한국과 비슷했나 보다. 남녀 모두가 성의 기쁨을 지향하지만 한쪽은 그걸 지양하는 듯 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의 행위에 인한 결과를 전적으로 한쪽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촘촘하게 구성되었다. 당대의 문화와 법은 이 경우에도 정답을 정해놓았다. 바로, 다른 모든 정체성을 포기하고 ‘미혼모’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선택은 법에 의해 금지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선 낙태/임신중지가 불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도운 사람까지도 처벌받았다.


영화의 초반, 안이 팬티 안쪽을 살핀다. 아무리 봐도 생리혈을 찾을 수가 없다. 안에게는 이제 생리(生理)가 없다. 그가 따를 만한 생의 이치 같은 건 인제 존재하지 않는다. 여태 안은 여러 이치를 받아들였다. 주격, 여격, 속격, 대격 등 라틴어 명사의 격변화를 학습했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외웠다. 파티에서 내면의 욕구를 감추고 조신한 여성인양 굴어대는 법도 배웠다. 그러라고들 하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수용할 수가 없다. 하긴, 의도치 않은 단 한 번의 일로 나머지 운명 전체가 결정된다는 데에 누가 수긍하겠는가. 


안은 공부하고 싶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에서 낳은 아이라면 자녀를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낙태는 금기다. 현실은 라틴어처럼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다. 대학의 강의실, 한 여학생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아서 교수에게 지적받는다. 수강생들이 수군댄다. 쟤 다른 과 남자랑 잤다네, 임신했다는 것 같은데? 곧 자퇴하겠어. 잠시 후, 교수가 안에게 묻는다. 아라공 시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은? 안이 답한다. 반복법입니다. 곧 자퇴할 여성이 맞닥뜨린 부조리는 <십 개월의 미래>의 미래에게 반복될 것이고, 이름 모를 숱한 여성에게도 반복될 것이며, <레벤느망>의 안에게도 반복되고 있다.


교실 밖, 안의 친구들이 라틴어 명사의 격변화를 암송하고 있다. 행위, 행위, 행위, 행위…. 안은 고무 된다. 받아들일만한, 납득할만한 해결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법의 틀 안에서 꿈틀대는 게 아니라, 법체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더 공부하기 위해서,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임신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안은 결단 한다. 안은 곧 자퇴할 여성의 반복과 복제이기를 거부하고, 법의 허락을 구하는 어린 아이이길 그만두고, 어떤 모습인진 몰라도, 아직 설명할 순 없어도, 자기 자신이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만의 질서를 세우기로 다짐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 순간의 안을 사건(L'Événement)의 주체라 말할 것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이란 기존의 지식으로는 포획되지도, 해명되지도 않는 돌발 상황이다. 주체는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우선 사건에 휩쓸려야 하고, 당대에는 허락되지 않는 미지의 것에 매혹되어야 한다(그래야 익숙한 기존 체계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오작동을 일으키는 고정관념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고, 그러한 어휘를 실천함으로써 여태 존재했던 것과는 다른 자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속의 존재가 바로 주체이다.


가령, 전태일은 어떠한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노동자의 현실에 눈을 떴다(사건). 그는 ‘모두가 인간처럼 사는 세상’이란 이미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매혹). 시다는 다 그렇지, 언젠가는 좋은 날 올 거야, 하는 허튼소리를 거부했다(고정관념에 대한 저항).  태일은 허울뿐인 근로기준법을 진정한 법으로 새로이 정의하려 한다(새로운 언어의 발명). 그는 스스로를 바보로 불렀는데 이는 정확한 설명이다. 당대의 지식으로 볼 때 태일의 행동에는 아무런 이점이 없다. 이대로 가면 그는 사회가 허락한 미싱사라는 자격까지 잃을 것이다. 그럼에도 태일은 근로기준법을 끝끝내 법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실천). 사건에 눈을 뜬 때부터 분신할 때까지 그는, 단 한순간도 누군가의 반복이나 복제가 아니었다. 온전히, 오로지, 그 자신일 뿐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삶의 길이가 아니라 자신으로 사는지 여부이다.


안도 마찬가지다. 그는 임신했다(사건). 안은 여태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배운 적은 없지만, 임신 후에도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고 싶고 공부하고만 싶다. 이러한 과정에서 안에겐 “중요한 일”이 생겼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이다(매혹). 남성 교수가 혼란을 겪는 안에게 묻는다. 가정 문제인가요 아니면 경제 문제인가요, 왜 공부를 하지 않는 거지요? 안이 답한다. 둘 다 아닙니다. 교수가 되묻는다. 둘 다 아니라면 당신은 말할 의지가 없는 거군요. 교수에겐 안의 문제가 포착되지 않는다. 남성 교수의 세계에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임산부라면 진작 자퇴했을 테니까. 교수는 마주하면서도 안을 보지 못한다.



안의 친구들은 낙태와 관련된 것이라면 한마디도 꺼내지 말라고 한다. 의사도 거든다. 임신중절은 꿈도 꾸지 말라며 타박한다. 안은 사려 깊은 말에도, 권위를 가진 이의 말에도 따르지 않는다(고정관념에 대한 저항). 그는 자신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재규정한다. “여자만 걸리는 병에 걸렸어요. 그건 여자를 집에만 있게 만드는 병이에요.” (새로운 언어의 발명)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태아를 자신의 몸에서 떨어뜨리려 한다. 안을 돕는 극소수의 이들이 말한다. 이런 식이면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안은 멈추지 않는다. 말 그대로 사경을 헤맨다. 그러면서도 지치지 않고, 견디면서, 끝까지 행한다(실천).


<레벤느망>에는 자기 자신이 되려는 사람의 여정이 담겼다. 안의 궤적은 전혀 인스타그래머블하지 않다. 그는 세상 사람에게 멋있다고 칭찬받기는커녕, 음란하고 방탕하며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여자라 손가락질만 받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비난을 감당하면서, 비좁은 고정관념을 벗어나 무한히 넓은 세계, 끝없이 하얀 지면 위로 자신의 존재를 이동시킨다. 영화의 끝에서 카메라는 응시하기를 멈추지만, 안이 글을 쓰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거기서 안은 자신만의 언어를 발명하고, 글을 쓰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이다.


감독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 영화를 분노와 욕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의 분노는 개개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정해놓는 고정관념과 사회에 대한 분노일 것이고, 이때의 욕망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뱉으려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이 되려는 욕망일 것이다. 안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레벤느망>은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세계의 절반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를 왜 나머지 절반은 고민해야만 하는가. 당대의 관습에 따라 섹스를 하지 않는 듯이 굴었던, ‘조신한 처녀’인양 행동했던 친구가, 고통스러워하는 안에게 와서 고백한다. 중년 남성과 오랜 기간 관계를 맺었지만 다행히도 임신하지 않았다고.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운이라고 할지라도, 운의 농도를 낮출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회의 수준은 운을 희석한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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