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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Mar 11. 2022

윤석열과 공포

<더 배트맨>


1.



오늘은 2022 3 10일이고 차기 대통령이 결정된 날이다. 당선 소감에서 말한 것처럼, 당선자가 국가의 부강과 국민의 통합을 이루길 바란다.


며칠간 무서웠다. 원치 않는 후보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적이 여러  있었지만, 이번만큼 공포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슬픈 예감은 현실이 됐다.  그런지 두렵다.     


최근 <더 배트맨>을 봤다. 배트맨(로버트 패틴슨)이 말하는 공포에 대해서 나름의 재간을 부려 글을 썼다. 지금의 심정에서 보니 그 글에 담긴 재치는 모두 거짓인 것만 같다. 나는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는데, 몇 개의 ‘좋아요’와 몇 번의 클릭을 더 받겠다고, 즐거운 양 쓴 글의 가치는 무엇이겠는가. 이 글을 볼 사람은 아마도 두려워하고 있을 텐데(기쁜 사람은 공포를 주제로 한 글을 보지 않을 테니), 공포에 대해서 유쾌한 듯이 적은 말의 값어치는 무엇이겠는가. 글쓴이의 마음을 담지 않는다면, 코믹한 에피소드를 넣고, 이름이 알려진 철학자를 버무린다고 하더라도, 공허한 텍스트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통해 내가 왜 공포감을 느끼는지를 분석해보려 한다. 실의에 빠지기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     


2.



“나는 복수다.” 배트맨이 말한다. 2년 차 배트맨인 그는 명성을 쌓는 데 성공했나 보다. 배트맨이 등장하자마자 불량배들이 겁먹는다. 실제로 그는 여럿과의 격투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을 만큼 강하다. 그뿐인가. 사냥용 소총에도 끄떡없는 슈트, 외향만으로도 깡패들의 기를 죽이는 배트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천문학적인 자금, 배트맨은 신체의 힘뿐만 아니라 여러 도구와 자원도 가지고 있다.     


제우스의 탄생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지 않듯이, 브루스 웨인이 왜 배트맨이 되었는지를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필름에도 웨인이 겪은 비극이 담겨 있지 않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관객은 배트맨이 비통함에서 태어났음을 안다. 웨인의 시간은 그때 멈춘 듯하다. 집사 알프레드가 회사 일을 돌보라고 말하지만, 복수의 화신은 상관없다고 답할 뿐이다. 그의 외출만으로도 화제가 될 정도이니 평소에는 은둔만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가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때는 범죄자를 단죄하는 때뿐이다.     


워낙에 유명한 세계관이라서 그렇지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이다. 아무리 고담시가 썩었다고 해도, 웨인 가문의 돈이라면 공권력을 다시 구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최소한 연방 정부에 대한 로비를 통해 도시를 재건하려고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배트맨 홀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경 단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웨인은 다른 모든 가능성에 관심을 두지 않고 홀로 범죄자를 벌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모르긴 몰라도 웨인 역시 고립에서 벗어나려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역시 인간이니까. 복수가 아니라 희망이나 평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염두에 두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도 웨인은 복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나아갈 ‘길에 무언가’(something in the way)가 있고, 그게 자기를 가로막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맷 리브스 감독은 웨인/배트맨을 너바나의 ‘섬싱 인 더 웨이’로 설명한다. 이 노래가 그를 나타낸다는 듯이 말이다.     


배트맨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고,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공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공포란 부정적인 미래에 대한 괴로움과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결합한 감정이다. 다시 말해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상황을 바꿀 수는 없을 때의 정서이다. 공포에 휩싸일 때 세계는 황무지가 된다. 거주민이 오로지 자기 자신인 그런 무인도가 된다. 두려워하는 이는 자신과 자신의 안전 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떠올릴 수 없다. 그에게는 타인도 없고, 공동체도 없고, 세계도 없다. 공포는 철저하게 자기애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공포에 빠진 배트맨은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 자기 혼자서 부정적인 일에 따른 괴로움을 떨치거나, 무력감을 극복해야만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제한다면) 제아무리 대영웅이라 하더라도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순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다.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기가 무력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힘을 쓰는데도 정당성이 필요하다. 정당하지 않은 힘의 발현은 부모를 죽인 괴한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웨인은 배트맨이 되어서 복수한다. 부모를 죽인, 고담 시를 망가트리는 범죄자를 벌한다.     


배트맨은 공포는 도구라 말하며, 범죄자를 벌하기 전에 공포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정신이 도구의 주인일 때만큼이나, 도구가 정신의 주인인 경우도 있다. 원시인은 아마도 음식을 익히기 위해서 불을 찾아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불이 있다 보니 음식을 익혀 먹으려 했을 것이다. 현대인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적합한 표현을 찾는 게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주어진 표현으로 사태를 파악하곤 한다. 배트맨도 마찬가지다. 그는 범죄를 없애기 위해 공포를 도구로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공포에 휩싸여 있다. 그렇기에 공포로 범죄인을 대하는 것이다. 배트맨에게 공포는 정신의 연장이 아니다. 정신의 감옥이다.     


3.



영화에는 배트맨의 이복동생이라 표현해도 무방할 듯한 캐릭터가 나온다. 공포라는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지만, 양육과정이 달랐던 인물이다.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인 리들러(폴 다노)다. 그에게도 부정적인 일에 의한 괴로움이 있었고, 그러한 과정에서의 무력감이 있었다. 배트맨은 힘을 통해 무기력을 해소하고 그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한다. 리들러는 부정적인 일의 원인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트라우마를 넘어서고자 한다. 내 탓이 아니라면, 모두가 타인의 잘못이라면, 엉망진창인 자신의 처지에 따른 책임을 피할 수 있다.     


리들러는 유독 가면을 벗겨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이는 예의, 교양, 문명이란 가면 아래에서 펄떡이는 인간의 이기심을 드러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기득권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야말로 자신을 다치게 한 원인이다. 리들러는 글이 적힌 가면을 사회 권력층에게 씌우기도 한다. “거짓말은 인제 그만(no more lies).” 리들러에게 진실은 기성 계급의 탐욕이 자신과 같이 무고한 이를 다치게 했다는 것이다.     


공포 속에서 배트맨은 철두철미 혼자가 되었다. 반면 리들러는 기묘한 방식으로 고립을 벗어난다. 그의 공포는 원한이란 변이종이 되었다. 원한은 약자의 감정으로, 질투와 열등감에서 비롯되어 강자를 파괴하려는 정서이다. 기득권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마음이다. 그리고 원한은 집단을 만드는 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다. 세상에는 비통한 자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예비 리들러‘들’이 세계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리들러는 온라인으로 리들러들에게 말한다. 가면을 쓰고, 총을 들고, 자신이 신호할 때 나오라고. 우리의 고통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저들 때문이라고. 싹 다 죽여버리자고.     


무력감을 떨치려는 배트맨, 비참의 원인을 떠넘기려는 리들러. 둘은 모두 공포의 자녀이다. 둘의 공통점은 출생에만 있지 않다. 배트맨과 리들러는 분노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도 공유한다. 가장 사회화가 덜 되었을, 그리하여 날 것 그대로의 분노를 표출하는 아기를 살펴보자. 아기의 분노에는 모순이 서려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력하고, 세계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중요하고 모든 이가 자기에게 관심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멋대로 울어대는 아기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그리하여 울음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면서도 아기는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내 문제에 달려들어 해결하라고 말이다. 이때 아기는 황제라도 된 듯이 눈물로 노여움을 쏟아낸다.     


다시 말해 배트맨은 무력감에 짓눌려 서러운 마음이고, 리들러는 타인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전자는 미물로서의 분노, 후자는 제왕으로서의 분노를 쏟아낸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둘은 하나다. 공포에 휩싸인 채 분노를 드러내는 존재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감독은 배트맨과 리들러의 등장 순간을 동일하게 연출한다. 뒷모습을 담는 것이다. 등을 맞댄 두 명은, 다른 곳을 보는 하나의 생명체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두 개이고 팔과 다리가 네 개인, 인간 본연의 모습처럼.      


https://thedailyfandom.org/platos-philosophy-hedwig-and-the-angry-inch/


4.



누구에게나 삶은 쉽지 않고, 인생은 팍팍한 순간으로 꾸려져 있다. 문제를 겪는다는 건 살아간다는 말의 동의어다. 다시 말해 살아있다는 건 수많은 문제를 지나왔거나 해결했다는 뜻이건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동시에 너무도 쉽게 생의 재앙과 슬픔과 비통과 회한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곤 한다. 무기력할 때 우리는 배트맨이 된다. 세상을 탓할 때 우리는 리들러가 된다. 결국, 파국이 휘몰아치는 고담시처럼, 우리의 삶에도 홍수와 지진과 대정전과 전쟁이 벌어져야만 하는 걸까.      


감독은 공포라는 문제를 잘 진단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적절한 처방까지 제공한다. 배트맨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인<저스티스 리그>에서 플래시가 묻는다. 당신의 슈퍼 파워가 뭐라고 했죠? 배트맨의 답이다. 난 부자야. 물론 엄청난 양의 돈도 그를 특출하게 한다. 하지만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은 진정으로 특별해진다. 영화의 후반에서 배트맨은 복수를 스스로 종결짓지 않고, 범죄자의 처분을 경찰에게 맡긴다. 어떠한 특수효과도 나오지 않는 이러한 장면에서 배트맨은 공포에 짓눌린 어린아이를 넘어서 성인이 된다.     


공포에 휩쓸린 사람의 세계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한다는 점, 문제 앞에서 쉽게 굴복하여 절망에 빠지거나 절대자가 등장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소하길 바란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자기 중심성과 절대자에 대한 소망, 이것이 무서워하는 사람과 어린아이의 공약수이다. 골방에 숨어들어 무력감만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폐허로 만들고, 절대자의 등장을 바라는 이는 세상을 폐허로 만든다. 전자의 사례로는 히키코모리를 들 수 있겠고, 후자로는 전체주의에 열광하는 폭민(mob)을 들 수 있다.     


너무도 뻔하게 들리겠지만, 공포와 분노의 해결책은 연대다. 동등한 이들 간의 주체적인 협력, 즉 연대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러 조건을 충족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연대하려는 이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 혼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에게 연대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또 철저하게 자기의 잇속만을 따지는 이들의 모임은, 겉으로는 연대와 유사할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대일 순 없다. 그 모임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도구로 여길뿐이다. 배트맨이 활용하는 슈트 정도로만 동료를 대하는 걸 연대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또 절대자를 갈망하는 이들로 구성된 집단은, 동등한 이의 단결이 아니라 주종 관계의 연장이기에 연대가 될 수 없다.     


둘째, 연대하려는 이는 동료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네가 나만큼의 존엄과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부모)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는 결코 연대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 상대를 돕는 우월한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는 이 역시 연대하지 못한다. 호혜와 시혜는 동등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셋째, 공동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목표는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 같은 부정적인 목적일 순 없다. 상대를 부수려는 이들 간의 일시적인 연합이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파괴의 대상이 없어진다면? 그룹은 해체된다. 그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연대의 중심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파괴하려는 상대에게 맡겨진다. 따라서 주체적인 연대는 자신들이 나아갈 길과 미래와 희망을 공유하는 이들의 ‘함께 함’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위한 연합은 일시적으론 폭발성을 보일지라도, 긴 생명력을 누릴 순 없다. 또한, 그러한 모임의 뿌리는, 그들이 부정하는 여성가족부에게 있다. 손에 손을 잡은 증오는 역설적이게도 상대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들은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상대를 부정하는 것만이 이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영화의 후반에서 진정으로 슈퍼히어로가 된다.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연대를 이루어내며, 공동의 목표까지 제시하기 때문이다. 연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조건 모두를 이루었으니 어찌 슈퍼히어로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의 시작은 혼자였다는 점에서 미비했지만, 그의 끝은 공동체를 이뤘다는 점에서 창대하다. 그의 동력은 공포에서 연대로 바뀌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도 구원받는다. 인간의 조건 중 하나인 서로 함께하는 삶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5.



<더 배트맨>에 따른다면, 내가 공포를 느끼는 건 아마도 윤석열 정권 앞에서 무력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인 것 같다. 정치적으론 어쩔지 몰라도, 개인으로 보자면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안철수 같은 사람도 저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고, 모욕을 주고, 자기 뜻에 따르게끔 하는데, 한낱 소시민인 나는 윤석열 앞에서 무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무의식적인 계산이 나를 공포로 밀어 넣는 듯하다.     


또 동료 시민을 믿지 못하는 데서 나의 공포가 강화되는 것 같다. 왜 이리 다들 어리석지? 저 분명한 답이 보이지 않나? 이러한 의문이 몇 달 동안 나를 붙잡고 있다. ‘꼰대’가 되지 싫어서 겉으로 표출하진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러한 질문이 떠난 적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꼰대임을 고백해야 한다. 여러 책에서 읽었고 심지어 나 역시 여러 글에서 쓰기도 한 말, 바로 다양성 그리고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대체 이는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차이를 승인하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성을 뛰어넘어야 한다. 공포는 그때야 제거될 것이다.     


삶은 확실히 난제이다. 인생은 논리의 명쾌함만으론 해명되지 않는다. 나는 우주의 중심에 나를 놓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면서도,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나 때문이라는 책임 의식을 떠맡아야 한다. 자기 중심성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기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절대 쉽지 않은 삶의 과제이다. 또한 나는 믿어야만 한다. 권력자에 대항하여 동료 시민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 나 하나로는 잘못된 일을 해결할 수 없지만, 함께라면 가능하다는 믿음만이 공포에서 나를 구해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6.  



<더 배트맨>에는 펭귄의 시선으로 본 배트맨처럼, 말 그대로 끝내주는 장면들이 있다. 폐소 공포증을 음으로 옮긴 듯한 음향도 빼놓을 수 없다. 내 마음에 흐르는 공포를 걷어낸 후, 다시 영화를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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