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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Mar 02. 2022

차별은 일베와도 같아서

<안테벨룸>


아는 사람 이야기다.


유학을 준비했던 지인이 토플과 GRE 시험이란 걸 봤다고 한다. 둘 다 어려운 영어 시험으로 알려졌다. 학원에선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줬단다. 신기하게도 두 번 모두, 지인을 제외한 구성원 거의 전부가 외국 출신이었다고 했다. 영어권에서 오래 살았는데 왜 이 닭장 같은 학원에 왔냐고 물으니, 회화에는 문제가 없지만 시험을 위해선 별도의 공부를 해야 하고, 그 별개의 훈련에 있어서는 한국의 학원만한 곳이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K-문법 지식은 위대하여라. 국제공항이라곤 인천과 도쿄 정도만 가본, 일평생 한국식 영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을 공부한 그는 금세 그룹에서 두각을 드러냈다고 한다. ‘검머외’ 조원이 지인에게 “형, I just wonder 이거”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순수 국내파 학생이 토플과 GRE에서 최고점을 받다, 같은 헤드라인을 떠올리며 그러니까 달콤한 몽상을 핥으면서 그는 수험 기간을 견뎠다.


몇 달이 흘렀고 첫 번째 토플 시험 날. 시험장에 발을 딛자마자 당황했단다. 586 컴퓨터를 연상시키는 기기 앞에 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험생마다 문제 출제 순서가 달랐던 것도 당혹스러웠다. 옆의 수강생이 중얼중얼 말하고 있는데 자신은 영어 강의를 듣고 있자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잔뜩 하고 시험장에 들어갔지만 마인드 컨트롤은 늘 현실을 좇아가지 못하는 법이다.


스터디 그룹에서 처음부터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둔 이는 없었다. 그 역시 그랬다. 특히 말하기 영역에서 30점 만점에 20점 초반대의 점수를 기록했고, 모든 영역에서 25점 이상을 받아야 하는 조건을 떠올리며 실의에 빠졌다고 했다. 다른 이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러나 시련은 같았지만 반응은 달랐다. 그는 정신력에 큰 데미지를 입었으나 다른 이는 재빨리 회복했던 것이다. 요컨대 회복탄력성 또는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에서 그와 스터디원 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결국 그는 여러 번의 시험과 여러 번의 낙담과 여러 번의 폭음과 여러 번의 주정과 여러 번의 도전 끝에 타협할 만한 결과를 받아냈다. 금주법 시대에도 술을 마셨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처럼, 그도 수험 생활 중에 술을 마셨다. 횟수는 적었으나 시험을 본 후에 엄청난 양을 마셔댔기에, 양으로만 치면 일반 사람을 쉽게 넘어섰을 것이다. 피츠제럴드가 알코올 중독 와중에도 그의 시대를 날카롭게 진단한 것처럼, 그도 나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놀랄 만한 사회학적 진실을 말하곤 했다. 그는 기억을 못 할 게 분명하기에 여기에 기록을 남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과 외국 생활을 한 사람의 영어 실력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도리어 자기가 낫다는 판단이 들 때도 많았다. 진정한 차이점은 상처를 입은 후에 회복하는 정도와 속도에 있었다. 타고난 ‘멘탈’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회복탄력성의 차이는 SKY라는 타이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그는 추정했다. 다른 조원들은 하나 같이 외국 생활 후에 명문대에 입학했다. 다들 명문대 재학생이었지만 자신은 그냥 대학원생이었다는 점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사회의 진보 정도는 문제의 원인을 얼마만큼 구조에서 찾느냐에 달렸다고 믿기에, 그의 술주정을 기꺼이 감내했다.


그에 따르면, 명문대생과 비 명문대생의 차이는 주변인의 시선에서 드러난다. 환대와 적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환대의 눈빛을 받으며 명문대생은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표출한다. 타인의 환영 아래에서 실수는 개성이 되고, 성과는 빼어난 자질의 발현으로 해석된다. 적대의 눈초리 속에서 비 명문대생은 자기를 검열하고 감추게 된다. 성공은 우연으로 치부되지만 실수는 실패로 확정된다. 그리고 타자의 눈길이란 자양분을 먹고, 처음 벌어진 미세한 차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끝에 가면 걷잡을 수 없는 격차가 된다. 대학 레벨의 차이는 삶의 레벨 차이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처럼 “지옥,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시험 준비를 하면서 격려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소속 대학에서 공부를 꽤 했다고 평가받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지잡대’ 학생이었던 것이다. 장학금을 받고 외국의 이름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건 명문대 학생들이나 하는 것이지, 여기에선 여태까지 그런 이가 없었다는 말을 한국인 사르트르는 무수히 들어야만 했다. 유학, “그것만이 내 세상”이에요. 하하하, 너는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 곧 인구가 줄어서 유학을 다녀와도 교수가 될 순 없단다. 그러니 일찍 그만 두자.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다른 이들은 친절하게, 안 될 거야, 라고 말했다.


우분투, 당신이 있어서 내가 있답니다. 듣기에도 좋은 이 말은 그를 제외한 다른 스터디원의 세계를 묘사한다. 세상 사람들은 명문대생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명문대생은 정말로 할 수 있게 된다. 한두 번의 낙방은 서울대생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선사하는 이벤트이지 수험 생활을 그만두게 하는 기제가 될 순 없다. 잘 될 거란 말만 들으니 안 될 것 같지도 않아서 명문대생은 포기라는 것도 모른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천상의 세계(SKY)와 그 주변에는 천사만 있는지 아름다운 노래와 격려가 끊이지 않는다.


문제는 타인의 시선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타자의 응시는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영향을 미치지만 명확한 데이터로 보일 수는 없다. 증거로 내세울 순 없지만 모든 것에 작용하는 요인인 것이다. 타인의 눈빛은 중력과도 같다. 생활의 조건이지만 특수한 때를 제외하곤 거론되지 않는다. 타자의 시선은 공기와도 같다. 삶의 전제이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 고려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응대는 중력이나 공기처럼 자연의 법칙은 아니지만, 한번 고착되면 변하지도 않고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종종 중력은 상관없다는 듯이 공중을 떠다니는 마이클 조던이 나오기도 하고, 때론 공기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심해로 잠수하는 해녀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영웅은 특별한 사례이지 일반적인 경우로 인용될 순 없다. 우리가 슈퍼 히어로를 좋아하는 건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희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여건만큼의 삶을 산다. 타인의 대우가 한 사람을 찍어내는 틀이 되는 것이다.



<안테벨룸>을 보고 몇 년 만에 위 이야기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재기 발랄한 이 영화에는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상적인 이미지가 적지 않게 담겨 있다. 횃불을 든 베로니카(자넬 모네)의 형상과 말을 타고 질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강렬한 기억이 되리라.


누가 봐도 잔뜩 신경 쓴 이러한 장면 외에도 유독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수험생 친구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흑인 여성인 베로니카는 마찬가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친구, 백인 친구와 함께 샴페인을 마신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이 특급이란 명성과 다르게 침구 정리가 엉망이라고 말한다. 금발 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친구가 깜짝 놀라며 답한다. 내 방은 완벽하게 세팅되었던데? 흑인 여성 둘은 또 그런 상황이냐며 서로 눈을 마주치고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다.


사실 베로니카의 방이 흐트러진 건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다. 다시금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타인의 응대는 중력이나 공기와 같아서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이 공개적으로 논의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베로니카가 호텔 측에 청소 상태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한다면 아마 그녀는 까탈스러운 흑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냥 없었던 일로 여기면 영화의 중후반에 드러나는 것처럼 큰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작은 피해를 놔두는 건 큰 피해를 초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타인은 겪지 않는 불편을 처리하느라 베로니카의 에너지는 여기저기로 낭비된다. 공적으로 잘못된 상황을 문제 삼을 때 그녀는 피해의식에 찌든 흑인이 된다. 가만히 있으면 그녀는 남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해결해야 하는 불공정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러한 진퇴양난은 거의 의논되지 않는다. 명문대생이나 백인과 같은 사회의 주류층이 사회의 담론을 주도하는데, 이들에게는 베로니카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수에게 없는 문제로 여겨지니, 아예 논해지지 않거나, 시끄러운 일부의 문제로만 간주된다. 그 사이에도 차별의 시선은 그치지를 않는다, 눈을 뜨고 있는 이가 있는 한.


영화의 후반에는 차별을 의인화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가 말한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나같이 둔감한 사람은 직접 봐야만 안다. 그리고 <안테벨룸>은 중력과 공기와도 같은 차별을 사람의 형태로 빚어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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