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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Feb 20. 2022

비교 안 하고 싶은데 '좋아요' 개수는 신경 쓰여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1.



딱 한 마디만 할게.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가 취하지 않는 법이 없듯이, 나는 한 마디에서 그친 적이 없었다. 좋은 맥주는 무엇인가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나의 한 마디는 거침이 없었다. 분명 그런 때가 있었다.


스무 해의 두 배만큼을 살았다. 이제는 흐릿한 그때가 떠올랐다. 며칠 전에.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났다. 나만큼 그 친구도 살이 쪘다. 돈가스를 먹기로 합의한 데서 왜 우리 둘의 배가 그리 튀어나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식당에 갔다. 메뉴판을 폈다. 주문을 했다.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오 분 정도 흘렀을까. 할 말이 없었다.


마침 여섯 조각으로 나뉜 돈가스가 나왔다. 한 조각의 고기튀김을 입에 넣을 때, 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아니고, 박사가 아님에도,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이 만남의 미래를 보았다. 나는 잘 살면 되는 거야 따위의 하나마나한 말을 늘어놓을 거고, 내 앞의 인물은 모든 이야기의 마무리를 대통령 후보에 대한 욕으로 채울 것이다.


적잖은 아저씨가 정치 얘기를 좋아하고 나 역시 그렇다. 그럼에도 대권후보 성토대회에 동참하지 않았던 건, 그들을 욕할수록 나 자신에 대해서 할 말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남 얘기로 이 만남을 꽉 채우는 건 내 인생은 뻔하고 볼품없고 재미도 없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다면 다른 얘기를 해야 했는데 대체 무슨 얘길 해야 하나. 기억이 솟아오른 건 그때였다. 분명 내가 말이 많았던 때가 있었지.


“그런 밤을 기억한다. 세상을 바꿀 계획들.” 이십 대의 밤, 조선일보의 폐간부터 진보 정치의 확대까지 정말로 많은 계획이 있었다. 이십 대의 낮, “세상을 바꿀 계획들”이 너무도 많아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계획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차피 잘될 것인데 고민할 필요가 무엇인가. 내 눈이 좋았는지, 세상의 해상도가 높았는지, 어쨌든 그땐 세계가 또렷했다. 명확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나아갈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2.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의 브래드 씨(벤 스틸러)도 나와 비슷한 이십 대를 보냈던 듯하다. 그리고 그는 어느덧 47살이다. 브래드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반문한다. 친했던 대학 동기들은 하나같이 잘 나간다. 할리우드의 거물, 황당할 정도의 부자, 돈 걱정 없이 두 여인과 함께 하와이에서 놀고 있는 한량, 백악관 출신의 하버드 대학 교수,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브래드는 초라해진다. 비영리회사의 SNS 홍보를 돕는 일로는 주변의 관심을 끌 수 없다.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일을 하는 브래드 자신의 관심마저 끌지 못한다. 그는 늘 벗어나고만 싶다.


간만의 이벤트. 아들 트로이(오스틴 에이브럼스)의 캠퍼스 투어를 위해 보스턴으로 가야 한다. 동행한 브래드는 세상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이 뻔한 얘기를 늘어놓는다. 대학은 별 거 아냐, 너 자신의 꿈을 찾아. 아들이 답한다. 아빠, 나 하버드 대학 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지가 답한다. 그래? 터프츠(자신의 모교) 같은 곳은 엿 먹으라 그래. 당연히 하버드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부터 습관이 되었는지 벤 스틸러는 자꾸 몽상에 빠진다. 아니, 얻을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고, 거의 모든 중년은 어드벤처를 즐기지 못하니, 아저씨와 아줌마가 달콤한 상상에 취하는 건 당연한 걸까. 브래드는 하버드를 졸업한 아들이 부와 명예 모두를 거머쥐는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그때 아들이 하버드 면접 날짜를 착각했다고 말한다. 브래드는 어떻게든 하버드 인맥을 찾아보려 애쓰고, 결국 크레이그(마이클 쉰)를 떠올린다. 잘 가꿔진 모습으로 TV에 나오고, 베스트셀러 <정치적 야수>의 저자이며, 백악관에서 일했고, 심지어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기도 한 그 재수 없는 친구 말이다.


TV에서 크레이그를 처음 봤을 때, 브래드는 전 세계가 합심해서 자신을 때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시계처럼 늘어진 채 방구석에 있는 자신, 노트르담의 성당처럼 세계의 중심에 굳건히 서 있는 친구. 이러한 비교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다. 게다가 크레이그는 기부를 부탁하는 자신의 말을 계속 무시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아들의 하버드 면접 기회를 날릴 순 없다. 그새 크레이그는 번호를 바꿨나 보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번호를 알아냈고, 생각보단 쉽게 문제가 해결됐다. 아무리 친구라도 대가는 줘야 하는 법. 브래드는 크레이그에게 저녁을 대접하기로 한다.


<어나더 라운드>처럼, 관객은 이 영화의 후반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십 대에 이 작품을 봤다면 분명 악평을 늘어놨을 텐데, 이제는 세상이 아주 견고히 짜여 있어 변화를 허락하지 않음을 안다. 이제는 나 자신의 이상주의가 내 머리 밖에선 작동한 적이 없음을 안다. 이제는 내가 별 게 아님을 안다. 그리하여 나는 브래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동정일지 연민일지 공감일지 연대일지 나르시시즘일지 자기비하일지 모를 감정으로 영화를 본다. 그 많던 떠벌이는 다 어디로 갔나. 그 많던 야심들은 어디에서 실현되었나. 이상을 설파하던 청년은 어찌하여 무력한 아저씨가 되었나.


이때 가장 할리우드스러운 조언자가 등장한다. 바로, 아들의 친구이자 하버드 재학생이고, 인도에서 온 외모까지 아름다운 아나냐(샤지 라나)다. 브래드의 신세한탄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감당한 뒤 현인이 말한다. 자기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게 집중하면 즐거움을 느낀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말이 많구나.) 남들과 비교하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임하는 것이다. 게다가 당신은 이미 많이 가졌다. 비교하지 말라. (패자는 말이 없다던데, 타인과 비교하며 자꾸만 패배하니 나는 말할 게 없었던 건가.) 


3.



글을 올리는 브런치 사이트에 알람이 떴다. “작가님의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쌓인 글은 책으로 탄생하기도 합니다. 작가님의 시선이 담긴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세요 :)”


가장 최신의 글이 2월 4일에 업로드되었고,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를 글을 올린 직후에 보았으니, 나는 16일째 답답하다. 브래드 씨에 대한 글을 써야 할 텐데 비교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대해 나는 무얼 말할 수 있는가. 두 시간밖에 되지 않는 영화인데 내 머릿속에선 이 작품이 이주 째 상영 중이다. 대체 어찌하면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청중 : “스님, 남들보다 못난 것 같아 괴로워요. 어찌해야 할까요.”

스님 : “비교하지 마세요.”

청중 : “비교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비교하게 됩니다.”

스님 : “어린아이가 손에 뜨거운 감자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손이 데었다면서 울어요. 그럼 나는 손에서 감자를 놓아라, 할 뿐입니다. 감자를 쥐고 있으면 뜨거울 거고 손에서 놓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비교를 그만두는 방법은 비교를 안 하면 되는 겁니다.”


보통의 청중은 마음이 좋아서 스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텐데 나는 고약한 인간인가 보다. 그리 쉽게 비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왜 상처를 받을까. 비교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비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왜 그리 쉬운 일을 하지 않는 걸까. 대체 나는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는 왜 자신의 처지를 남과 비교하는 걸까.


며칠의 고민 끝에 첫 번째 가설을 세웠다. 언어 때문에 비교를 한다. 언어학자 기 도이처는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전한다. 어떤 부족민은 방향을 통해서 모든 걸 설명한다. 저기 파란색 티셔츠를 줘,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북동쪽에 있는 물건을 줘, 라고 말한다는 거다. 이들은 어디에 가든 무의식적으로 모든 물체의 방위를 파악한다. 그래야만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위의 일화처럼 우리 한국인(중학생 친구들도 내가 선배니, 네가 선배니 하는 걸 여러 번 목격했기에 나의 주장은 10대에게도 적용이 된다)은 타인을 만날 때 나이를 묻는다. 근데 띠가 무엇이실까, 하는 클래식한 질문부터 나는 08 황 아무개(2008년에 태어난 황 아무개라는 10대 사이에서 통용되는 표현법)인데 그쪽은요, 하는 새로운 조어법까지 방식도 다양하다. 자신과 상대의 서열을 결정짓고 이야기를 한다. 흠, 그렇다면 우리는 서열을 확정한 후에야 관계를 맺으니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구나,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미스터 브래드는 한국인이 아니지 않은가! 서열 중심의 언어 체계에 의해 우리는 비교에 취약해졌다는 가설을 폐기해야 한다.


4.



다음 가설은 실감을 느끼지 못해서 비교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무얼 봐도 신기했다. 흙을 만지면서도 눈이 커졌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흙이란 건 세상에 널려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음식이란 것도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품게 되며, 한때 한 번만 할 수 있으면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섹스조차도, 체력의 한계로 인해서 기피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아니다. 나는 여전히 체력이 대단하다).


제정신이 박힌 상태에서는 뭘 해도 재미가 없는 이들은 술을 마신다. 켜켜이 쌓아온 교양을 무너트리고, 그간의 지식을 알코올로 녹여내면, 어렸을 때 느꼈던 그 기분, 가만히 있어도 즐거운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신다. 그런데 여기에도 이성이 개입한다. 지금은 즐겁지만 이 술로 인해 너의 머리통은 내일 박살날 거란다, 라는 지성의 속삭임이 들린다. 그리하여 지루한 와중에서도 중년은 술을 멀리하게 된다.


취하자니 기운이 없고, 도취에 빠지자니 숙취가 두렵다. 그렇다고 무덤덤하게 있기에도 지친다. 뭘 마주해도 그런가 보다 하다가 이내 산송장들은 새로운 오락거리를 발명한다. 나를 고양시켜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면, 남을 깎아내려 상대적으로 나를 드높이자. 그래서 산송장들은 다른 송장을 비아냥대고, 헐뜯고, 물어뜯는다, 마치 좀비처럼. 아니면 냉소에 빠진다. 세상 모든 것에 통달하여 판결을 내리는 판사인양 말이다. 결국 정치인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더럽긴 매한가지지, 라는 식의 냉소에서 산송장은 은근히 자신을 결정권자의 위치로 드높인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는 법. 남을 힐난하던 잣대는 남에게만 향하지는 않는다. 홀로 있을 때, 어쩌다가 스스로를 되돌아볼 때, 비교의 잣대가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또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하기에 무엇으로도 깎아내릴 수 없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에도 남을 헐뜯는 기준이 자신에게 적용된다. 너는 결국 저 사람에 비해서 예쁘지도, 몸이 좋지도, 유명하지도, 돈이 많지도 않구나. 결국 비교의 승리감은 비교의 열패감이 된다.


그렇다면 답은 실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로 향하지 말고 자신과 자신이 마주하는 대상,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거 진짜 맛있다며 감탄한 지가 언젠지도 모르겠다. 여기 정말 멋지다며 탄성을 뱉은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보통은 인터넷에서 유명한 맛집과 풍경을 찾곤 하는데, 인증샷 덕에 사진에는 경험이 박제되어 있지만 기억에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미스터 브래드는 작품의 끝에서 음악회를 보며 실감을 느낀다.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는 건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그는 온전한 환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여운을 느끼며 나는 살아있다, 우리는 살아있다, 라는 말을 밤새 반복한다. 음악회가 답인 걸까. 여태 나는 극장과 미술관을 전전해서 실감을 느끼는 데 실패했던 걸까.


실감, 사실감, 박진감이 필요하다. 살아있음의 징표가 요구된다. 숨이 터질 때까지 뛰어볼까.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먹고 마셔볼까. 대화하고, 토론하고, 갈등하고, 싸워도 볼까. 무얼 하듯 처음인 듯이 굴어볼까. 일상을 모험으로 바꿔 부를까. 아침부터 죽음을 생각하고 매 순간이 마지막 순간임을 깨달아야 할까. 그런데 이 글의 ‘좋아요’는 몇 개나 찍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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