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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Sep 08. 2022

아침에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썬다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닐(팀 로스)은 참여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걸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죽어가는 걸까. 물고기의 아가미가 느리게 움직인다.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는 닐에게 천 조각이 들이닥친다. “일어나요(wake up). 들어와요. 안 차가워요.” 수영하는 젊은 남녀가 닐에게 소리친다. 수영에 참여하지 않는 닐. 잠시 후에 그는 미지근하게 덥혀진 호텔 수영장에서 떠다닐 것이다. 어디로 흘러가도 상관없다는 듯이.


 닐은 결혼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고급 호텔에서 휴양을 즐기는 닐과 앨리스(샤를로트 갱스부르)는 부부가 아니라 남매다. 닐에게 바다에 들어오라 소리친 청년 둘은 조카, 즉 앨리스의 아들과 딸이다. 휴양지의 밤. 식당에서 가수가 노래한다. 닐의 조카인 젊은 남자아이가 너스레를 떤다. 자기 스타일이라며 말이라도 걸어보겠다는 것. 앨리스는 저 여성이 오빠 닐의 스타일이라 말하지만, 닐은 중년 남성 치고도 혈기가 없다. 자기에게 말 걸지 말라는 듯이 어정쩡한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다.


조카 둘이 체스를 둔다. 남자아이는 엄마에겐 같이 게임하자 말하지만 삼촌에겐 말조차 걸지 않는다. 아마 평소에도 같이 무언가를 한 적이 없는 모양이다. 다이빙 쇼를 보는 넷. 썬다운, 즉 해가 떨어지는 것처럼 사람이 떨어진다. 다이빙 묘기를 선보인 배 나온 남자들이 닐이 속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팁을 주는 닐과 멀리서 보는 게 낫다고 딸에게 귓속말하는 앨리스. 다이빙은 묘하다. 스펙터클한 자살 같기도 하고, 생명력을 한껏 발휘하는 추락 같기도 하다. 닐은 몰락의 스피드가 싫지 않은 눈치지만 앨리스는 그걸 멀리 두고만 싶다. 


닐이 무덤덤하다고 해서 세상도 무덤덤한 건 아니다. 앨리스에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짐을 싸고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앨리스와 자녀들은 같은 방향을 보며 초조해하지만, 닐의 시선은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내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앨리스는 오열하고 자녀들은 황망해한다. 닐은 그대로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이미, 호텔서 퍼져있는 닐 위의 태양을 직시한 바 있다. 태양과 오늘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 이제 관객은 영화와 <이방인>을, 닐과 뫼르소를 겹쳐 볼 수밖에 없다. 그에 부응하기라도 하는 듯, 닐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공항에서 그는 거짓말을 한다. 여권이 없어졌다고, 여권을 찾고 곧 출국하겠다고. 셋을 떠나보낸 뒤 그는 택시에 탄다. 서두르려는 기색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 그저 호텔만 말할 뿐이다. 이렇게 자기의 행선지조차 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자기 인생에도 불참한다.



닐은 얽히지 않으려 한다.


나는 탕웨이와 얽히지 않으려 한 적이 없다. 애초에 얽힐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섞일 일이 없다면 섞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얽히지 않으려 한다는 건, 기본 값이 얽힘이란 것이다. 닐과 우리의 세상은 얽힘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로 떨어진 것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뒤엉킨 함수와도 같은 곳이 바로 세계이다.


닐이 머물게 된 아카풀코 해변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평화와 공포가 얽혀있다. 세로 꼴로 앉아 있는 닐 뒤를 무장한 군인들이 가로 방향으로 지나간다. 공항에서 닐을 태운 택시기사는, 해변에 앉아있는 그에게 괜히 말을 건다. 자기 친구들을 소개하며 말이다. 다른 멕시코인 남성도 닐과 대화를 하려 하는데 그 역시 좋은 의도로 접근한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불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베레니세(이아주아 라리오스)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닐의 파트너가 된다. (닐은 그녀와 처음 섹스할 때조차 늘어져있다.)


감독 미셸 프랑코는 세계의 디폴트, 즉 뒤엉킴을 보여준다. 빨간색 티셔츠와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뚱뚱한 사람 둘이 해변에 앉아있다. 화면 정중앙에 체구가 있는 사람 둘이 있으니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대비되는 색이 나란히 있어 보기에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은 금세 깨진다. 보트를 타고 온 괴한이 해변에 있는 어떤 남성에게 총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붉은 피가 파란 바다와 섞인다. 이렇게 <썬다운>의 세상에선 그리고 우리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뒤엉킨다.


두 번째 죽음이다. 첫 번째는 엄마, 두 번째는 멕시코인. 첫 번째 사건은 어느 정도의 파장을 일으켰다(최소한 앨리스와 그녀의 자녀들에게). 반면 두 번째 죽음은 관광객의 스마트폰을 몇 번 작동시키는데 그친다. 닐과 베레니세도 금세 자리를 뜬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면에서 평등하지만 사후처리는 평등하지 않다. 유럽인에게 다가온 부조리는 사건이 되고 멕시코인에게 들이닥친 부조리는 구경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은 고기볶음. 이는 감독의 악취미라기보다는, 어떤 시체는 고깃덩어리처럼 여겨진다는 메시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닐과 베레니세도 동등하지 않다. 베레니세는 닐에게 진심인 듯 보이지만, 닐은 그녀를 그렇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레니세는 넉넉해 보이지 않는 형편이지만 닐은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알아채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관심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닐은 자신이 사는 런던에도 한 번 가보라고, 로마도 아름다우니 여행할 만하다고 그냥 때우듯이 대화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독백한다.


실존주의라 불리는 사조는 고독한 개인의 철학으로 알려져 있다. 소란스러운 세상 사람들(세인)의 호기심과 잡담에서 벗어나, 인간과 존재의 근본 조건에 대해서 고뇌하는 철학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사글세 걱정과 취업에 대한 우려와 모멸을 피하려는 시도와 총 맞아 죽지 않으려는 노력과 뒤엉키지 않은 상태를 필요로 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에게, 갑자기 총알이 날아오는 곳에서 사는 이에게, 실존의 번뇌는 아마도 사치일 테니까.


물론 삶의 조건, 이유, 목적,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생각은 사포와도 같아서, 쓸데없이 튀어나온 곳을 다듬을 수 있고, 날카로워야 하는 곳을 더 뾰족하게 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라는 틀에 강제로 끼워 맞춰지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형체가 뭉툭해질 테지만, 생각을 하면 받아 들어야 하는 것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고, 그러한 구분 위에서 자신의 모양을 더 아름답게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사회라는 틀을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과 가깝게 다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실존주의로의 진입이 누구에게나 허락된 건 아니지 않느냐고, 실존주의는 벌거벗은 개인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생활의 질곡에서 벗어난 이(가령, 부유한 백인 남성)에게만 가능한 건 아니냐고,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다듬기도 전에 폭력 속에서 으스러진 이들이 있지 않느냐고, 감독은 묻고 있다. 뫼르소는 실존주의적 고민으로 혼란스럽지만, 그의 총격으로 아랍인은 확실하게 죽었다. 닐은 실존주의적 근심에 빠져있지만 그 옆에 있던 멕시코인은 삶에서 빠져나갔다.



닐은 떠다닌다.


모든 얽힘에서 도망친 덕에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게 된 닐. 그에겐 엄마의 장례식도, 눈앞에 있는 베레니세도, 뿌리를 내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토양이다. 닐이 영화의 시작에서 응시하던 물고기의 부레처럼, 그는 뿌리 없이 물 위에 떠 있는 부레옥잠과 같은 신세가 됐다. 그러나 아직 떨쳐내지 못한 가지가 있다. 바로 동생 앨리스. 연락이 되지 않는 닐이 걱정되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동생이 다시 멕시코로 온다.


관객과 마찬가지로 앨리스도 오빠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닐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상속 재산도 포기하겠다 말한다. 닐과 앨리스는 거대 도축 기업을 일군 부모의 자식이다. 닐은 가족과 기업의 미래를 앨리스에게 양도하려 한다. 이제 다이빙이라는 하강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던 앨리스는 기업을 상승시켜야 할 것이다. 자살과도 같은 추락을 보고 미소 지은 닐은 자신의 삶도 떨어뜨리려 할 것인가.


실존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상이 엉망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닐을 태우고 다닌 택시기사가 친구들과 작당하여 앨리스를 죽인다. 고급 호텔에 있는 앨리스를 보고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뫼르소를 좇아 닐 역시 구치소에 수감된다. 동생의 죽음과 연루된 혐의로 말이다. 얼마 후의 면회에서, 영국 영사관 직원은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냐고 닐에게 물을 것이다.


세 번째 죽음. 미래를 떠맡으려는 이가 죽었다.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닐은 갇혔다. 이상한 세계라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지, 이상한 일이 벌어져서 이상한 세계가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건 지금 여기는 무척이나 이상한 곳이다. 구금된 닐에게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멕시코인 용의자와 범죄자들 사이에, 닐이 속한 기업에서 무수히 죽였을 돼지가 한 마리 누워있는 것이다. 닐이 자신을 돼지와 자신을 동일시한 걸까. 옴짝달싹 못한 채 우리에 갇혀 죽는 돼지 그리고 닐.


돼지는 반복해서 등장한다. 영화의 제목에 어울리는 일몰, 즉 해가 진 뒤의 바다. 네댓 마리의 돼지가 모래를 파며 놀고 있다. 닐이 베레니세와 어울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것일까. 해변에서 노는 관광객 무리를 연상한 것일까. 갑갑한 구치소에 있던 돼지 한 마리는, 해변에서 다른 돼지와 함께 잠깐의 여유를 즐긴다. 그 사이 닐이 구금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다시금 베리니세를 찾는다. 재회의 섹스 뒤에 카메라는 해변 위에서 춤추는 임산부의 배를 클로즈업하지만, 닐은 자녀를 염두에 두는 사람이 아니다. 임산부는 다른 일행이었고, 닐은 베레니세와 해변에 앉아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둘. 순간, 돼지가 또다시 등장한다. 영화의 네 번째 죽음이기도 하다. 베레니세의 집 문 앞에 돼지가 난자가 된 채 죽어있다. 베레니세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을 보아 닐의 환영인 듯하다. 닐이 쓰러진다. 엄마의 죽음에도, 멕시코인의 죽음에도, 동생의 죽음에도 무표정했던 닐이었건만, 자기의 죽음을 무던히 받아들일 순 없는 듯하다.


그제야 우리는 닐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닐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실존주의적 번민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앞질러가, 스스로에 대해 묻는다는 면에서 닐은 실존주의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형을 코앞에 두고서야 삶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었던 뫼르소와 달리, 닐은 무력감에 빠져 시름시름 앓았다. 일 인분의 몫을 해내지 못해 주변의 불편을 잔뜩 끌어다 썼다.


간호하는 베레니세 몰래 닐은 병동에서도 벗어난다. 실존주의에 진입하지 못했을 멕시코 뒷골목의 사람들을 스쳐간다. 그리고는 아마 어느 숙소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바람에 나부끼는 생명력 없는 셔츠와 커튼만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있다. 스스로는 실존주의 철학자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적지 않은 이가 그를 실존주의자로 분류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시끄러운 세상 사람들의 소음에서 벗어나, 죽음에 미리 달려가 볼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꾸려나갈 수 있다. 하긴 죽기 전에 최저가를 찾겠다고 포털 사이트 여기저기를 몇 시간씩 헤매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자각한다면, 죽기 전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설지도 모르겠다.


미셸 프랑코는 이러한 발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해 진짜 자기 자신이란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무기력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감독은 아마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않고, 아침에도 밤에도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과 얽힌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낫다고 말할 것이다. 곁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다가도, 실존적인 고민이 들 때가 있을 터인데, 그럴 때엔 고상한 사유를 할 여유가 없는 이들을 바라보는 게 낫다고 말할 것이다. 자신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 사람은 시들어갈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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