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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Sep 27. 2022

어른의 라이선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어른의 라이선스



어른의 라이선스는 무엇일까. 성인(成人)이 되려면 무엇을 이루어야(成) 할까. 혹자는 주민등록증이 있으면 어른이라 말할 것이다. 누구나 만 17세가 되면 성인인 걸까. 주민등록증을 마패처럼 휘두르며 만 17세 청년이 편의점에 들어선다. “나는 성인이다. 나는 나를 망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며 술과 담배를 집는다. 그는 곧장, 아직은 자신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썩 꺼지거라!”라는 가게 주인의 사자후와 함께.


그러고 보니 주민등록증은 주민이란 사실이 적힌 문서이지 성인임을 입증해주는 증서가 아니다. 어른의 자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르트르는 ‘나와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이’를 지식인이라 말했다는데, 이를 차용하여 성인됨을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일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타인과 공동체의 일에도 관심을 두는 이가 어른이다, 라는 명제는 어떨까. 분명 선거는 어른에게만 허락된 행위이긴 하다.


역시 정의를 내리는 건 쉽지 않다. 사르트르 식의 정의 역시 곧장 반례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익숙할 질문의 연쇄가 바로 그 반례이다. 대학은 어디 가기로 했니, 살은 언제 뺄래, 취업을 해야지, 결혼할 때 되지 않았니, 아이는 언제 가질래, 서울에 집 한 채는 마련해야지 등등. 끝없는 질문 폭격은 틀림없이,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질문 공세는 상대방의 대답을 듣기 위함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본인이 성인임을 드러내어 보이려는 시도였던가. 만약 어른이 넓은 오지랖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적지 않은 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골다공증에 시달리면서도 어린이를 자처할 것이다. 동맥 경화증과 고혈압에 시달리는 어린이는 오지랖을 부리는 ‘성인’과 달리 해롭지도, 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른인양 구는 사람 중에서 위와 같은 질문을 하는 이가 많다는 건, 대다수가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를 이러한 관점에서 규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특정한 사람을 출처로 하지 않는다. 소위 명문대가 값진 이유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이다. ‘결혼 적령기’는 과학적인 근거를 갖기보다는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주택이나 돈이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것은 사회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이다. 윤석열도, 문재인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서울대가 값지다고 말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좋다더라, 한 말이 퍼진 것일 뿐이다.


율리에의 해방일지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도 그렇다.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존재가 되고 싶은데, 어른이 되고 싶은데 무엇을 이루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불안하다. “미친 듯이 공부하거나 스마트 폰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럴수록 정신이 산만해졌다. 끝없이 업데이트와 피드 알람이 울렸고, 인터넷에는 해결할 수 없는 국제문제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모든 걸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율리에의 자아는 비대해졌고, 인터넷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면에서 율리에의 자아는 초라해졌다.


운이 좋은 경우, 불안은 추진력으로 이어진다. 율리에는 운이 좋았다. 의대에 진학했다.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입학이 힘들다는 점, 남들이 인정해준다는 점 때문에 그렇게 했다. 허나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의 맛집 추천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남들이 좋다는 것도 막상 해보면 별로인 게 많다. 율리에에게는 의대가 그랬다. 특히 율리에가 속한 외과 분야는 목수처럼 겉만 다루는 것 같아서 더 싫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겉이 아니라 속, 외양이 아니라 실체에 다가가기로 한다. 심리학과로 전과를 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실체는 감정과 정신이라 믿는 (이 시기의) 율리에는 흡족하다. 게다가 의대를 포기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서, 성숙을 찾아서 심리학과로 과를 옮긴다니, 주변에서도 찬사가 잇따른다. 그런데 감정과 정신이란 것도 결국 겉모습에 의해 틀 지워지나 보다. 심리학과 교수는 율리에의 내면을 알기도 전에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고, 율리에도 그게 싫지 않았다. 금세 깊은 관계가 되지만 이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가 진짜 관심을 두는 건 시각이었구나! 율리에는 심리학과에서도 벗어난다.


사진작가가 되기로 한다. 학자금 대출로 카메라와 렌즈를 샀다. 생활비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당한다. 고향에 온 느낌이다. 권태로 가득했던 오슬로가 새롭게 느껴진다.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얼굴들. 모델과 교제한다. 그러나 이 역시 쉽게 싫증 난다.


인터넷이 동서양의 구분을 없앴는지, 율리에의 모습은 한국 청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느낌. 그래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데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원해서 한 것이 아니기에 금방 염증이 난다. 그 와중에도 인터넷으로 삼라만상을 관장하기에 자아상은 비대해져 간다. 현실 세계의 내 모습은 높아진 자아상과 걸맞지 않기에 여기/지금이 내가 속한 곳, 내가 속할 곳이 아닌 것만 같다. 다시금 현재에서 도피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느낌…. 이러한 순환은 율리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파티 장에서 율리에는 유명한 만화가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리)을 만난다. 철학자 헤겔이 정반합의 마법으로, 율리에의 여정을 하나로 빚어놓은 것만 같은 인물이다. 의대가 상징하는 사회적 인정, 심리학에서 찾고자 했던 자유로운 정신, 사진에서 구하고자 했던 감각, 그 모두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바로 악셀이다. 그는 자신의 도발적인 상상력을 시각 매체에 옮겨서 명성을 얻었다. 율리에는 악셀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온 모든 게 여기 있으니 말이다.



벗어남으론 이룰 수 없으니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2개의 챕터로 이루어졌다. 이제 1장, ‘다른 사람들’이다. 율리에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연인 악셀과 함께, 악셀의 친구들을 보러 간다. K-아저씨, 아줌마보다는 덜 하지만 여기서도 기성세대는 질문 세례를 쏟아낸다. 무슨 일을 하나요, 글을 쓰고 있다는 데 맞나요,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등등. 율리에는 답할 수가 없다. 남들이 좋다는 걸 일단 맛보고는 있는데 아직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이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악셀이 아기를 갖자고 제안한다. 악셀 자신은 자아를 고민할 시기를 지나왔고 이제 안정이란 챕터에 접어들고 싶단다. 다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애 낳고 잘 살고, 막상 닥치면 다 할 수 있다는 제언도 빠지지 않는다. 율리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아직 제대로 해본 것도 없는데, 덜 큰 것 같은데 어떻게 부모가 된단 말인가. 때로는 남이 보는 내 모습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율리에가 거부하자 악셀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넌 그게 뭔지도 모른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만 있어.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1장의 가든파티에서 율리에의 처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율리에가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다. 율리에의 등이 화면을 좌우로 가르는 선인 것만 같다. 네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가 잠자기 싫다면서 율리에의 이쪽과 저쪽에서 날뛴다. 아이의 엄마는 이제 잘 시간이라면서 아이를 좇는다. 본능과 즐거움에 충실하려는 아이가 율리에라는 선을 넘나들고, 규범과 절제를 강요하는 성인도 율리에란 선을 드나든다. 율리에는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다. 그저 그 사이에 끼어있는 무엇일 뿐이다.


2장 ‘바람피우기.’ 자신의 말대로 성장을 마친 악셀은 팬들에게 둘러싸여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율리에는 아직 노바디, 즉 아무것도 아니다. 글을 쓰곤 있지만 출판물이 없기에 작가라 말하기도 머쓱하다. 사진도 찍지만 전문가라고 하기엔 무안하다. 본인이 글과 사진을 진심으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율리에가 자신에 대해 소개할 수 있는 건, 임시로 일하는 서점 직원이란 타이틀뿐이다.


자신의 이상과 자신의 현실 간의 괴리를 견딜 수 없게 된 율리에는 파티 장을 떠난다. 오슬로를 걷는다. 카메라를 등지고 도시를 바라본다. 그녀는 아마도 지금 당장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본인의 인생 전체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율리에는 악셀을 떠나야 하는지를 고민할 때, 악셀의 죽음을 인지한 채 거리를 서성일 때, 다시 한번 같은 구도로 오슬로와 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영화의 원제 ‘세상 최악의 인간’은 아마도 율리에를 뜻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율리에를 최악의 인간으로 보지 않을 터인데, 그 까닭은 그녀가 반성과 자기 수용이란 미덕을 갖췄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회피와 도피라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테지만, 그러한 선택들이 빚어놓은 것이 자신임을 인정하고, 자책에 빠지기보다는 좀 더 본인이 충실할 수 있는 무엇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율리에를 최악의 인간에 머무르지만은 않게 해 줄 것이다.


세상 최악의 인간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아무 파티 장에나 들어간 율리에. 거기서 그녀는 노르웨이 애덤 드라이버, 아니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를 만난다. (정말 닳았다.) 에이빈드는 악셀의 반대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건장한 체격이고, 성공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신적인 활동보다는 아마도 육체적인 활동에 관심을 두는 듯하다. 하룻밤 동안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서로의 매력에 빠져든다.


얼마 후, 둘은 ‘나쁜 타이밍’에 재회할 것이다. 그리고 율리에는 악셀을 떠나고, 에이빈드는 자신의 연인과 헤어질 것이다. 둘은 동거할 테지만, 악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도 싫증을 느낄 것이고, 둘은 결별하게 될 것이다. 율리에는 사랑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본인과 본인의 성장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에이빈드와의 가장 좋은 순간에도 율리에는 그랬다. 에이빈드가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하자, 율리에는 나를 완벽하게 해 줘서, 나를 견뎌줘서 고맙다고 답한다.


일부종사(一夫從事), 즉 한 남편만을 섬기는 게 미덕이라 생각하거나, 부부와 연인은 사랑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의무로 함께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율리에를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율리에는 3명의 남자 친구를 갈아치웠다(의대 재학 시절의 남자 친구, 심리학과 교수, 사진 모델). 그리고 양극단에 위치한 두 명의 남자를 더 만나고, 둘 모두에게 결별을 통보한다. 이게 아닌 것 같은 느낌, 벗어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율리에는 의연한 모습이다.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어찌 저리 뻔뻔하게 살아가느냐며 분통을 터트릴 이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거기에서 율리에의 성장을 볼 것이다. 율리에의 성숙에는 몇 가지 자양분이 있었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만 따르지는 않겠다는 결심, 본인 삶에 있어 구경꾼이기를 그치려는 다짐, 지치지 않고 온갖 것을 시도하는 용기, 부족한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다독일 줄 아는 여유,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를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유가 그것이다. 


율리에와 감독 요아킴 트리에는 어른의 라이선스로 앞의 덕목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제안할 것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틀에 맞춰 본인의 모양을 훼손시키지 말고, 때로는 사회의 스탠더드를 벗어나는 최악의 인간이 되어보라는 것. 그리고 최악의 순간에서 전에 발견하지 못한 기쁨이 있다면 거기에 충실해보고, 다음번에는 이전보다는 나은 최악이 되어보라는 것. 그렇게 최악의 수위를 개선해가는 게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아마도 율리에와 감독은 말하지 않을까.


율리에를 세상 최악의 인간이 아니라 어른이 된 존재로 규정한 이는, 세상 최악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것이다. 사회의 기준 아래에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묻어둔 사람 또는 도덕적 규범만을 좇다가 자기의 잠재력과 창의성을 모조리 놓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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