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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Nov 03. 2022

우연에게 친절한 것으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모든 것을 합치니



영화에는 무엇이 담길까. 장 뤽 고다르는 언젠가 여자와 총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영화에는 치정과 사랑이 있다. 살인과 정의가 있다. 온갖 떠들썩함이 있다. 반면 로베르 브레송은 연극과 다르게 시네마토그라프(영화)에는 침묵이 담긴다고 적었다. 물론 이때의 침묵은 시골길의 한적함을 필름에 옮긴 형태가 아니라 일상에선 포착되지 않는 적막을 드러내는 일일 테지만, 어쨌든 브레송에 의하면 영화에는 정적이 있다. 두 거장의 말을 종합하면 영화는 시끄러운 것이고 조용한 것이다.


선문답은 참선하는 이에겐 깨달음을 향한 길이겠지만 평범한 이에겐 빈말과 다르지 않다. 아마도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도 선문선답 같은 말에 만족하지 못했나보다. 그는 영화에 무엇이 어리는지를 직접 찾으려 한다. 극장에 간다. 스크린과 극장의 전경이 모두 담기는 곳에 카메라를 놓는다. 조리개를 연다. 영화가 시작한다. 인물이 나온다. 대화하거나 하지 않는다.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다. 기뻐하고 노여워하며 슬퍼하고 즐거워한다. 영화가 끝난다. 조리개를 닫는다. 이제, 카메라에 영화의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


그런데 결과가 없다.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게 아니라 사진에 허공만이 담겼다는 것이다. 수다와 과묵이 카메라에 새겨진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공백이 새겨졌다. 이때의 공백, 즉 무(無)는 브레송이 말한 침묵과는 다르다. 공기가 흡연자의 한숨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침묵은 입을 다문 사람, 고요한 풍경 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텅 빔은 말 그대로 텅 빈 것이다. 거기엔 사람도, 사물도, 자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다와 침묵이 합쳐지니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영화의 전체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무(無)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브리씽>)의 에필로그에서 조이(스테파니 슈)도 텅 빔을 본다. 스기모토는 사각 스크린에서 밝은 공백을 봤지만 조이는 세탁기 원통의 어두운 공백을 응시했다는 게 차이점일 뿐이다. 스기모토의 카메라가 영화의 움직임 전부를 잡아들여 합친 결과가 무(無)였다는 걸 고려하면 우리는 조이의 눈이 뒤엉킨 빨랫감과 어두운 배경을 어떻게 종합해낼지 추측할 수 있다. 티셔츠와 청바지와 점퍼가 여기저기 뒤엉켜 어지러운 효과를 내고 있지만 결국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있다고 한다면 무(無)만이 있다.


조이는 바보도 아니고, 우울증 환자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 세상 사람들은 빨랫감이나 세금 고지서 따위를 보지만 조이는 그것 너머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엇을 직시한다. 진리에 대한 정의 중 하나는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 조이가 응시하는 무(無)야말로 모든 것과 연관되고(모든 집합은 공집합을 부분집합으로 가진다), 모든 곳에 존재한다. 이러한 진리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때 무언가가 있다고 해도 끝내는 없어진다.


Hiroshi Sugimoto, <Carpenter Center>, Richmond, 1993.


무언가 잘못되었다



영화는 세탁기 통의 원형처럼 둥그런 거울을 비추는 걸로 시작한다. 거울이 비추는 건 함께 노래를 부르는 에블린(양자경)과 남편 웨이먼드(케 후이 콴), 딸 조이다. 엄마 에블린이 딸의 입을 장난스레 막기도 한다. 셔터가 떨어지듯이 쿵 소리와 함께 거울 위에서 가족의 일상이 떨어진다. 이제 거울이 비추는 건 중국계 미국인 이민자 가족의 생활이다. 카메라가 원형, 즉 거울로 빨려 들어간다. 조이가 본 둥근 공백처럼, 둥근 거울 안에 에블린과 웨이먼드와 극중 인물들이 거주한다. 무(無), 즉 죽음만이 확실한 세계에서 사는 이들이다. 우리들이다.


에블린이 세무조사를 대비하여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다. 웨이먼드는 그녀에게 할 말이 있지만 날카로워진 에블린은 남편에게 화를 낼 뿐이다. 안 그래도 바쁜데 중국에서 에블린의 아버지까지 와있다. 하필 이 타이밍에 딸 조이가 동성 연인 베키를 데리고 왔다. 부글부글 끓는 에블린을 기어코 터트리려는지 어떤 녀석은 세탁기에 신발을 넣고 돌리고 있다. 다른 남성은 죽은 부인과 같은 향수를 쓰는 것 같다며 에블린에게 추파를 던진다. 동전교환기가 20달러를 삼켰다고 채근하면서. 한쪽에선 ‘코쟁이’ 백인 여성이 맡긴 빨래를 찾아가겠다고 성화다.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감독은 죽음, 즉 무(無) 외에는 확실할 게 없는 이 세상을 빨래방에 은유한다. 세무조사처럼 지루하고 의미를 찾기 어려운 일이 있다. 아버지를 부양해야 하는 것처럼 짊어져야 할 의무도 있다. 남편 웨이먼드처럼 훼방만 놓는 듯한 가족이 있다. 이들은 대체 왜 이리 말을 듣지 않는지, 딸 조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해댄다. 세탁기에 신발을 넣는 이처럼 나를 방해하는 이가 있다. 추파를 던지는 남성과 재촉하는 여성처럼, 늘 누군가가 나를 몰아댄다. 세계는 정신없이 번잡하지만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에블린은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세무조사원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에블린은 이제 자기의 선택과 결정들을 지우고만 싶다. 사업 경비로 구입한 노래방 기기 영수증을 옷에 뭍은 얼룩처럼 세탁하고 싶다. 어디서 빨 수 있을까. 빨래방의 손님들도 다르지 않다. 부인과 사별한 남성은 동전교환기에 20달러를 넣었지만 에블린에게 10달러밖에 받지 못했고, ‘코쟁이’ 여성은 이미 계산까지 했음에도 자기 옷을 되찾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모두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무언가 잘못 됐다. 예전엔 좋았는데. “어떻게 돌아가지?”


남편과 딸이 얘기 좀 하자고 조른다. 에블린은 단칼에 거절한다. 이러한 단호함 덕에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에블린이 남편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세무당국에 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웨이먼드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 에블린은 변한 듯한 웨이먼드가 씌워준 기기를 통해 자신의 전생을 돌아본다. 딸이라 죄송하다는 의사의 말, 여자는 뛰는 거 아니라는 아버지의 말, 저 녀석과 결혼하면 연을 끊겠다는 부모의 말, 빨래방을 차린 그 날, 조이가 태어나 빛났던 순간, 딸이 반항해서 슬펐던 그때, 그리고 세무조사까지.


상남자 같은 웨이먼드는 사실 알파버스, 다른 우주와 통하는 기술을 만든 최초의 우주에서 왔다. 조부 투키라는 강력한 악당이 다중우주 전체에 악을 퍼뜨리고 있고, 알파 웨이먼드는 이를 막을 존재인 우리 세계의 에블린을 찾아왔다. 정신이 없는 에블린. 그 와중에 남편이 이혼을 고려한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이해되지 않는 한 나절을 보내고 다시 집에 돌아와 영수증 더미 앞에 앉는다. 이 세계의 웨이먼드가 무슨 생각을 하냐고 그녀에게 묻는다. ‘모든 것.’ 세상 모든 소리를 합친 듯한 굉음과 함께 1부 <모든 것>이 시작한다.



모두가 부질없다



<닥터 스트레인지 2>에서는 영화를 맥 빠지게 했던 멀티버스 설정―이런 식이라면 어떤 인물이 죽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판타스틱4를 대체할 판타스틱5, 캡틴 아메리카를 대신할 캡틴 카터 등을 다른 우주에서 데리고 오면 되니까―이 <에브리씽>에서는 설득력을 갖춘다. 영화에 의하면, 우주는 우리의 선택/행위에 의해 변화하고, 생성된다. 예컨대, 에블린이 현 우주에서 부모의 뜻을 거슬러 애인과 함께 집을 나갈 때, 에블린이 부모에게 순종하며 집에 머무르는 우주가 생성되는 식이다.


매 선택의 기로에서 우주가 분열된다.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의해 현 우주의 모습이 결정되고 동시에 현재와 다른 차원의 우주가 만들어진다. 어디선가 시작된 우주에서 무수한 멀티버스가 생성되고, 숱한 멀티버스에서 또 다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멀티버스가 탄생한다. 무한한 우주는 지금도 끝없이 발산 중이다. 현 우주는 무한에 속한 점 하나다. 우리 우주와 가까운 우주일수록 유사한 모습이고, 멀어질수록 다른 모습을 띤다고 한다. 멀티버스 설정은 얼핏 힘을 북돋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조이와 같은 영민한 이에겐 사실 불쾌한 것이다.


주체가 전 우주의 동력이라는 면에서 전능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허나 멀티버스 설정은 무력감의 초대에 더 가깝다. 뭔 짓을 해도 우주는 팽창한다. 우주가 커질수록 우리의 위상은 하찮아진다. 누군가 어떤 일을 함과 동시에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은 우주가 탄생한다. 그 사람으로 인해 두 우주의 모습이 달라지겠지만 그래봐야 그때뿐이다. 주인공이 되는 순간은 곧바로 이어질 무한한 변화에 파묻힌다. 한 우주에 속한 행위자는 무한에 가깝고, 그러한 무한의 존재에 의한 선택과 행위도 무한하다. 우주는 무한에 무한을 곱한 속도로 변하고, 태어난다.


우리 인간은 거대한 우주에서 티끌에 불과하다. 알파버스 사람들은 인간의 초라함을 극복하려 했는지 다른 우주와의 접선 방법을 찾아냈다. 우주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넓히는 기술이다. 알파 세계 조이는 우주를 건너뛰는 버스점핑에 소질을 보였지만, 알파 에블린의 강압적인 훈련에 의해 정신이 깨져버린다. 온 우주에 그의 정신이 퍼진다. 그리하여 모든 가능성의 실현과 실패를 보고, 알게 된다. 모든 우주에서 온갖 능력을 골라 쓸 수 있으니 전능해진다. 조이는 조부 투바키가 되었다. 조부는 편재하고, 전지하며, 전능하다.


편재, 전지, 전능. 이는 전통적으로 신의 정의가 아닌가. 모든 곳에 존재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 조부는 “올바름이란 나약한 자를 가두는 상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규칙을 어른이 따르지 않듯, 인간의 도덕률과 지식은 신을 가두지 못한다. 우리가 객관적 진리, 도덕적 관념이라 여기는 것이 조부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박스일 뿐이다. 상자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진리와 관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 인간은 그걸 엉망, 혼란, 혼돈 또는 질서가 없다는 면에서 무(無)라 부른다.


모든 색을 합쳐보자. 시커먼 심연만 남는다. 모든 빛을 섞어보자. 너무도 눈부셔 볼 수 없게 된다. 살인이 금지된 우주와 적을 살상하는 것이 미덕인 우주를 혼합해보자.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일까. 다시 말해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섭리는 인간에겐 파악되지 않는다. 그 모든 걸 포섭하는 단 하나의 확실함은 결국 모든 게 소멸한다는 것. 이를 포착한 조부 투바키는 전 우주를 담아내는 유일한 진리, ‘모두가 부질없다’(nothing matters)는 메시지를 담은 상징을 만든다. 블랙홀 같다. 검고, 한 가운데에 공백이 있고, 모든 걸 빨아들인다. 베이글이다. 조부는 베이글이 자기 자신까지도 없애주길 바란다.



허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인간 형상의 블랙홀인 조부 투바키. 그는 허무의 화신이다. 공백을 보는 자는 거기에서 각자의 욕망과 회한을 본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전혀 상관이 없는 이(nobody)에게서 자녀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조부를 마주한 에블린도 거기에서 자신의 정동과 대면한다. 에블린은 딸이 뚱뚱한 게 싫었다. 조부가 돼지를 끌고 온다. 에블린은 동성애자 딸이 남자 같다. 조부가 엘비스 차림이다. 에블린은 동성애가 음란하게 느껴진다. 조부가 거대한 딜도를 들고 있다. 에블린은 타이거 맘이었나보다. 조부가 어느새 훈련만 한다고 알려진 한국 여성 골퍼 행색이다.


에블린은 자신의 강압이 만들었고 무(無)라는 우주의 진리를 체현한 존재, 조부 투바키와 대결해야 한다. 그간의 삶이 정당했음을 증명해야 하는 세무조사 기간에, 에블린은 딸에 대한 태도가 정당했는지도 입증해야 한다. 상대는 통계적 필연성, 즉 죽음이란 무기를 지니고 있다. 모든 걸 무력하게 하고, 모든 걸 소멸시킨다. 상대를 넘어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상대보다 더 완벽해지는 것. 그러나 없음보다 더 없을 순 없다. 허무보다 더 허무할 순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상대와 다른 방식으로 상대를 극복하는 것이다.


조부는 통계적 필연성의 의인화이다. 삶의 필연적인 결과는 죽음이다. 다들 무언가 하는 척 하지만 세금내고 빨래하고 세금내고 빨래하고 그러다가 사라질 뿐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온 우주가 종국엔 사라진다. 그렇다면 에블린은 통계의 반대, 필연의 반대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외와 우연이 그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이 사실을 자각한다면 잠시나마 필연에서 벗어날 수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일, 예외적인 일,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다른 우주의 자신과 접하는 버스점핑의 방법도 그것이다.


가진 것이 없는 이에게, 이제 잃을 것은 없고 얻을 것만이 남았다는 말을 하려면 얻어맞을 각오도 해야 한다. 상대 처지에 대한 조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메시지를 관객의 화를 돋우지 않고 위트 있게 전달한다. 에블린이 너무도 많이 억눌렀고, 너무도 많이 실패했기에 긍정적인 가능성과 낙관적인 다중우주를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태 했던 대로, 필연적인 대로 행하는 게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식으로 움직인다면, 에블린은 스스로 만족할 만한 우주를 개시할 수 있다.


필연이자 허무인 조부 투바키와 예외이자 가능성인 에블린이 대결한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 때,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지고 건설적인 마음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다. 에블린은 조부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해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세도 이내 사그라든다. 라따구리를 되찾으려는 요리사가 지치는 것처럼. 조부가 말한다. 결국은 통계적인 필연성을 따르게 되어 있어.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부질없다. 조부처럼, 에블린도 돌이 된다.



우연에게 친절한 것으로



이때 고려하지 못했던 변수가 등장한다. 남편 웨이먼드다. 에블린은 예외와 우연과 가능성이란 무기로 허무에 대응했지만 이것만으론 역부족이었다. 그때 현재의 웨이먼드와 다른 우주의 부자 웨이먼드가 다른 방편을 알려준다. 다들 무섭고 혼란스러워 싸우곤 하지만, 모든 게 자기 잘못 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절은 늘 관계에서 나오는 덕목이다. 혼자서 화를 낼 수도 있고, 울 수도 있으며, 심지어 죽을 수도 있지만, 혼자서는 친절할 수 없다. 친절은 늘 타인을 대하는 덕목이니까.


웨이먼드는 늘 장난감 눈을 가지고 있다. 흰자 안에 검은 눈동자가 있다. 시커먼 테두리 안에 하얗고 텅 빈 공백을 지닌 베이글이 반전된 형태다. 이제 에블린이 다시금 블랙홀과 대결한다. 이따금씩 통계에서 벗어나는 예외를 택하고 그와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 타인과 함께 하는 것으로써. 그러고 보니 조부는 통계적 필연성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상징이기도 했다. 죽음은 언제나 고립의 사건이다. 순장(殉葬)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결국 나의 죽음은 나만의 것이다. 수십억이 함께 숨을 쉬고 있어도 결국 나의 들숨과 날숨은 나만의 것인 것처럼.


정글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기적이어야 하고,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선 우악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에블린,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아버지와 닮아서 타인에게 기성의 가치만을 강요했던 에블린. 그런 에블린이 변한다. 조부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부는 모든 걸 합하여 허무해졌지만 에블린은 우연과 타인을 결합하여 친절해졌다. 그토록 많은 가능성, 그토록 많은 생성, 그토록 많은 소멸을 실감한 이라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를 인연이라 부르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진 않을 것이다. 조이의 말처럼 어색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삶에는 무엇이 담길까. 모든 게 무(無)가 된다는 면에서 밑이 뚫려버린 그릇과도 같은 우리의 삶에 무얼 담을 수 있을까. 다르게 될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현해가는 즐거움, 주변에 서린 수수께끼를 맛보는 기쁨,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었음에도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감사와 사랑, 희노애락의 출처이자 세계의 공백을 가려주는 사람들, 무한한 선택지 중에서 기어이 나와 얽히고 만 나의 사람들, 이러한 것들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엔 사라지겠지만 그래서 소중한 것들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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