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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Jan 26. 2023

잘 짜인 경첩처럼

<더 레슬러>




유명한 밈이자 상품 사용 후기 글이다.


Q : 애들이 다 짜가라고 웃어요.

A : 그런 일로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고객님의 인생은 진짜니깐요!


위의 답변은 어느 정도의 진실을 품고 있다. 사회생활을 할 때 우리는, 진짜 자기라고 생각하는 면모를 드러내기보다는, 주어진 역할에 걸맞은 모양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회인은 알몸을 내세우기보다는 타인이 기대하는 패션을 내보인다.


소설은 허구다. 즉, 가짜다. 그러나 어느 고백 못지않게 진실을 드러내는 허구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이렇게 길게 혼잣말하는 인물이 어디 있냐고, 우주에 왜 사람이 사냐고 묻지 않는다. 그러한 거짓을 통해서 드러나는 삶의 어떤 진실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프로 레슬링은 가짜다. 하지만 어느 소설 못지않게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가짜다. 왕년의 슈퍼스타 랜디(미키 루크)에게 캐시디(마리사 토메이)가 묻는다. 프로 레슬링은 다 가짜라던데? 랜디가 자기 몸에 새겨진 진짜 상처를 보여준다. 찢어진 전완근과 부서진 쇄골이다.


캐시디는 스트리퍼이자 교양인이다. 랜디의 답을 듣자마자 성경의 한 구절을 읊기 때문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캐시디는 해석학자이기도 하다. 랜디가 ‘가짜’ 액션으로 생긴 진짜 상처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의 의미까지 풀어내기 때문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랑 똑같아. 두 시간 동안 예수님을 채찍, 활, 바위로 패는 영화야. 예수님은 그걸 참고 견디지. (상남자네.) 희생양 램처럼.


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영화가 시작한지 약 20분 만에 램을 예수의 반열에 올린다. 기독교 이론에 의하면, 예수는 못 박혀 죽음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씻어주었다. 램 역시 두들겨 맞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는 무엇을 이루어주는가. 아마도 선(善)이 이긴다는 바람을, 영웅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소망을, 결국엔 잘 될 거라는 희망을 실현해줄 것이다. 내내 두들겨 맞다가 승리함으로써 말이다.


캐시디의 대사로는 부족했는지 미술팀은 랜디의 등에 예수 얼굴을 문신으로 새겨 넣었다. 이제 랜디는 남은 한 시간 이십 분 동안 얻어터질 것이다. 마지막에 승리하려면 이러한 고난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신적인 존재이고 랜디는 인간이다. 예수는 신의 말씀을 듣고 고행에 나섰지만 랜디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사회인일 뿐이다. 우리처럼 평범한 랜디, 그를 견디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건 주변의 인정과 환대이다. 축구장에 들어선 손흥민은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을 테고, 그곳이 자신의 땅임을 확신할 것이다. 주변에서 그를 긍정하고 환영하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볼 때, 성인 남성 여러 명이 공을 더 차겠다고 다투는 것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지구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축구라는 가짜에 어떤 진짜가 서려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손흥민의 활동에 열광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광의 에너지는 손흥민의 자존감으로 보존이 된다.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는 이는 행복하다. 행복은 부족함이 없이 넘쳐흐르는 상태에서 발생한다. 삼겹살을 먹을 때, 여기 쌈장이 있었더라면, 같이 먹을 애인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오롯이 삼겹살의 맛에 빠져들 때, 행복도 씹히는 것이다. 매한가지로 자기에 대한 확신을 흠뻑 뒤집어쓸 때 그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랜디는 무대 위에서 레슬링을 할 때 행복하다. 자기에게 확신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레슬링을 잘 해낸다. 그의 레슬링은 인정받았고, 환대받았다. 레슬링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인정과 환대 역시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인정받거나 환대받은 것도 아니다. 랜디는 약물을 꽂아가면서, 쇠잔해진 육체를 애써 부풀리면서, 80년대와 달리 초라해진 무대를 애써 외면하면서, 여전히 링에 오른다. 그의 자존은 인정과 환대를 필요로 하고, 랜디에게 링은 인정과 환대를 수혈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역경을 마주하는 랜디를 보며 어떤 희망을 품고, 랜디는 역경 속에서 인정과 환대를 보충한다. 이때 관객과 랜디는, 자신과 세상의 이음새를 걱정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앞으로 무얼 해야 하지 하는 의문도, 이대로는 아니라는 불안도, 가야할 곳을 모르겠단 막막함도 자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홀로 떨어져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레슬링에 어떤 진짜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레슬링을 통하여, 잘 짜인 경첩처럼 열광과 인정과 환대와 자존으로 서로를 여물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의 첫 영화로 <더 레슬러>를 본 건 우연이었다. 이전까진 다소 뻔하지만, 캐릭터와 주연 배우의 삶이 겹쳐져 있어 어느 정도의 감동을 자아내는 영화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보고는 오열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슈퍼스타인 적이 없었지만, 랜디의 서툰 사회생활과 돌아가야 할 곳으로의 회귀에 동감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아니라는 불안감과 달리 해볼 수도 없다는 무력감은 자기에게 잘 맞는 옷을 걸친 채, 잘 맞는 역할을 해낼 때, 그걸로 인정받고 환영받을 때, 사라진다는 걸 배울 수 있었다. 심장이 터질지라도 링에 가는 게 맞다. 랜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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