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다 위스키 패밀리>
술을 먹고 엉망이 된 경우를 담은 영화는 많다. 배우 매즈 미켈슨이 돋보이는 <어나더 라운드>, 토드 필립스 감독의 <행오버> 시리즈가 떠오른다. 술을 소재로 한 영화는 더 많다. 알렉산더 페인의 <사이드 웨이>는 이 분야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작품이다.
술을 만드는 사람들을 다룬 영화는 많지 않은 듯하다. <코마다 위스키 패밀리>는 텅 빈 영역을 메꿀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소재의 생경함을 완화하기 위해서인지 해당 텍스트는 익숙한 가족 담론으로 귀결된다.
관객은 술을 주조하는 절차 외에는 이야기의 진행을 거의 다 예측할 수 있다. 기대되는 갈등과 예상되는 봉합을 만나는 여정이 <코마다 위스키 패밀리>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건 노인들이 생각하는 혁명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젊음과 늙음을 물리적인 나이로 규정하지 않는다. 낯선 것에 대한 매혹, 그 매혹에 충실하겠다는 용기, 끝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겠다는 결단이 내가 생각하는 젊음의 지표다.
알랭 바디우는 어디에선가 롤링 스톤즈를 ‘가짜 젊음’의 사례로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믹 재거의 신체 나이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그들이 스스로의 신화를 미믹킹하고 섀도잉한다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루이는 그런 면에서 노인의 표상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여러 어려움을 겪는 증류소와 아버지의 대표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코마’ 위스키를 되살리는 게 그녀의 목표다. 루이의 관심은 코마의 재해석이나 변용에 있지 않고 좋았던 그 시절의 그 술을 있는 그대로 다시 만드는 것이다. ‘가족의 술’을 통해 그녀는 실재했던 이상 공동체를 부활시키려 한다.
코타로는 이내 젊다가 작품 전체가 강권하는 늙음에 급속도로 감염된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다. 청춘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여러 혼란에도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게 무의미하고 결국은 다 허상이지 않을까, 하는 급진적인 태도까지 짊어지기 때문이다.
<패밀리>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이는 코타로를 한심하게 본다. 그들은 다른 얼굴을 한 보수주의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할 것을 요구받는 게 그의 처지다. 이러한 과정이 즐거울 수 있다는 설명도 빠지지 않는다. 주점에서 친구가 굳이 보태는 말이다. “코타로, 너 즐거워 보이는데?”
작품은 원래 있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주어진 것에 충실한 자는 선량하게 묘사된다. 직원들은 월급도 깎이고, 비전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증류소를 매각하는 것에 결사반대한다.
반면 주어진 역할에서 이탈하는 이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루이의 오빠는 어머니에게 증류소를 팔 것을 권하는데, 술을 전혀 모른다고 몇 차례나 말하는 어머니는 거의 아들과 의절할 기세로 거절한다. 위스키의 재건을 꿈꾸며 대기업 증류소에 취업한 오빠는 영화의 중반부까지 빌런으로 그려진다.
아버지가 만들었던 코마를 되살리는 장면에서 보수주의 예찬은 절정에 이른다. 아버지의 테이스팅 노트를 얻게 된 주인공들은 그가 미래를 남겨 놓았다는 다소 황당한 말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코마 근처까지 간 루이. 모든 것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깨달음과 함께 코마를 완성한다. 코마(팽이)는 결국 이토(실)와 어울려야 한다는 것, 모든 것에는 주어진 역할이 있고 그것에 충실하면 만물은 조화를 이룰 것이란 깨달음이다.
이러한 사회는 안정적일 것이다. 변화는 가능성에서 탄생하는데 모두가 스스로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맡겨진 노릇에만 매달리는 사회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코타로는 그러한 안정성에 탄복한다. “흔들리지 않고 돌아가는 영원한 행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우리의 상황과 처지가 떠올랐다. 근래 본 것 중 가장 저급하고 터무니없던 것은 ‘조이고 댄조(댄스+체조)’였다. 넥타이를 맨 할아버지 시의원을 중심으로 장년층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치어리더와 같은 복장으로 춤을 춘다. 의원은 케겔 운동으로 “자궁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 저출생”을 이겨내자는 취지에서 외친다. “쪼이고, 쪼이고!”
아마도 그는 근엄한 마음가짐으로 괄약근을 조였을 것이다. 시의원이 박자를 맞추는 노래는 ‘진또배기’다. 여러 버전의 퍼포먼스가 있는데 하나같이 노인 세대, 즉 의원과 그의 또래 세대가 좋아할 법한 노래다. 노인들이 모인 장소에서 노인들의 노래와 춤으로 젊은이들의 저출생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1970년대라면 눈감아줄 만한 기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해왔던 대로, 원래의 방식으로 사회를 되돌리면 된다고 믿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지혜를 가진 자신의 말을 듣고 좋았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저출생을 비롯한 여러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게 그의 신념일 것이다. <패밀리>의 원제는 ‘코마다 증류소에 온 걸 환영합니다’라고 한다. 우리도 외칠 수 있다. 노인의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