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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겁도 없이 밥도 안 굶고 도미니칸 집에 갔다_24052

미국생활 282일 차

by 솜대리



대망의 조이네 집 초대 날이 왔다. 지난번에 조이 엄마랑 플레이 데이트 하면서 스페인어에 진땀을 빼서, 이 날을 대비해서 듀오링고 스페인어도 며칠 했다. ㅎㅎ 다행히 조이네 언니 오빠들이 중간에서 번역을 해줘서 스페인어는 문제가 아니었는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ㅋㅋ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2시에 오라고 했다. 그러다간 또 더 일찍 와서 하루 종일 같이 보내도 된단다. 2시에서 저녁때까지면 하루 종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서 점심을 먹고 1시에서 1시 반 사이에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니 바로 주스와 엄청난 사이즈의 햄+치즈 말이를 내놓았다. 쿠키도 권하는 데 그건 안 먹겠다고 했다. 여기서는 플레이 데이트 할 때 애들이나 뭘 좀 먹지 부모들이 뭘 먹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역시 도미니카 사람들이라 여기랑은 다르군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분명 점심을 먹고 온다고 했는데 (스페인어로 문자로 말했으니 소통이 잘 못 되었을 리는 없다.) 음식이 다 되었다고 남편은 언제 오냐고 몇 번을 물었다. 원래 남편은 저녁 시간 조금 전에 올 계획이었다. 여기서 플레 + 가족 식사를 몇 번 했는데, 보통은 부모 한 명씩 나와서 데리고 놀다가 다른 부모가 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편에게 자유 시간을 좀 줄 심산으로 남편은 저녁 먹기 한 시간쯤 전에 오겠다고 했었는데, 어제 하원하면서 만난 조이 엄마가 왜 남편이 늦게 오냐고 물었다. 빨리 오길 바라는 눈치라, 남편이 꼭 하려고 했던 고장 난 옛 핸드폰 수리만 하고 오기로 했다. 말도 그렇게 해놨고. 그런데 자꾸 음식을 보여주며 맛도 보여주고 얼른 우리를 먹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문제는 나도 배고프지 않았다. 저녁을 먹을 거고 간식도 못 먹을 테니 점심을 많이 먹고 온 직후였다. 햄+치즈 말이는 안 먹었고 주스만 마시는데도 배가 불렀다. 아 남편오기 전에 레모네이드와 크림, 설탕을 섞은 도미니카 음료도 하나 만들어줬다… 우리가 간지 1시간 반 만에 남편이 왔다. 남편은 오자마자 맥주를 한 병 마셨고, 그 후에 바로 음식을 먹었다. ㅋㅋㅋ


도미니칸 음료. Morir soñando 라고 원래는 주로 레모네이드 대신 오렌지로 만든단다.


배가 불렀지만 맛은 있었다. Sancocho라는 수프를 먹었다. 소고기 (살코지/ 소꼬리), 돼지고기 (족발), 유카, 플랜틴, 호박이 들어간 수프였다. 뿌리 식물이 많이 들어가니 보통은 밥은 안 곁들인다고 하는데, 내가 밥도 같이 먹는 거냐고 물어서 그런지 밥도 해줬다. 밥은 풀풀 날리는 쌀로 지은 냄비밥이었는데, 소금을 쳐서 짭짤했다. 보온을 하려고 함인지, 우리가 먹고 나서도 냄비에 낮은 불을 계속 켜놓는 게 신기했다.


보기만해도 배부르다 ㅎㅎ 아보카도를 1/4 쪽 올려주는데 잘 어울렸다.


진한 고깃국에 각종 향신료와 호박 맛이 더해진 Sancocho는 맛있었다. 향신료가 강하긴 했지만 맵지 않아서 조이도 잘 먹었다. 미역국 외에 국은 거의 안 먹는 우리 딸은 맨 밥만 퍼먹었지만. ㅎㅎ


그 후에도 계속 마실 걸 권하고, 집에서 만든 Flan (계란과 우유로 만드는 디저트)도 권했다. 팝콘에 나초까지 권했지만 나초는 간신히 막았다. 나야 임산부라 그럴 일 없었지만 남편은 위스키도 마셨다. ㅋㅋ 아내가 남편을 중간중간 제제하고 남편도 계속 술이 약하다고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거의 쓰러질 때까지 함께 마실 기세였다. 우리가 몰라서 겁도 없이 밥도 안 굶고 도미니칸 집에 갔다 ㅎㅎ


스페인 디저트 플란. 아무래도 도미니카도 스페인어권이라 음식 문회도 일부 공유하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새로운 문화가 많았다. 그 집만의 분위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걸 엄청 물었다. 처음에 초대할 때부터 나는 도미니카 음식도 모르는데 내가 메뉴를 고르도록 했고, 그 집에서도 계속 내가 원하는 음악이나 영화를 물었다. 나는 잘 모르니 도미니카 음식/ 음악 중 아무거나 해달라고 하면, 여러 종류를 다 나열하고 그중에 고르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뭘 보여줄지 결정이 되면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Sancocho는 조이 아빠가 만들었는데, 우리가 묻지 않아도 열심히 만드는 법을 설명해 줬다. 음악을 들려줄 때도 춤을 함께 보여주고 싶다더니, 유튜브에 마땅한 영상이 없자 부부가 직접 춤을 보여줬다. (!)


도미니카에 다녀온 사람들 말로는 그곳만의 웰컴 문화가 있다던데 진짜 그런 것 같았다. 우리 보고 도미니카에 놀러 오라고, 오면 자기 집에 초대하겠다고 했는데 엄청 가고 싶었다. 어차피 여름에는 딸내미도 방학인데. 진짜 가고 싶었는데 여름이면 너무 만삭이라 거기서 애를 낳을까 봐 못 가겠다… 아쉬워라.


애들끼리 진짜 잘 놀아서, 거의 남편과 둘이 놀러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가족 구성은 굉장히 독특했다. 우선 조이네 아빠는 할아버지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흰 수염이 성성한 남자랑 인사를 나누게 돼서 나는 그 사람이 아빠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조이의 오빠(!!)였다. 조이 아빠는 이미 5남매가 있는데, 역시나 15살 딸이 있는 조이 엄마랑 결혼한 거였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조이 언니랑 조이를 낳았고. 양 쪽을 합하면 8남매였다. 조이 아빠의 원래 자식들과도 자주 교류를 하지만 다들 커서, 선천적 장애가 있는 딸 한 명 외에는 다들 나가 사는 것 같았다. (그 흰 수염의 오빠는 뉴저지에 사는데 놀러 왔다고 했다.) 그런데 다들 굉장히 가까웠다.


조이 엄마는 장애가 있는 딸에게 편하게 스킨십을 했고, 조이는 그 언니에게 자주 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그 언니는 보통 귀찮아했다. 그냥 피가 섞인 자매 같은 느낌이었다. ㅎㅎ 조이의 오빠랑 조이의 15살 언니도 피가 하나도 안 섞였고 나이 차이도 많지만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굉장히 화목해 보였다. 조이 엄마 아빠도 자연스럽게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나, 조이 엄마가 남편 혼자 직장 생활하는데도 굉장히 가정적이라고 평소에 얘기해 온 것만 봐도 사이가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가족들 중에는 확실히 가장 서민층이었다. (물론 맨해튼임을 고려해야 하지만) 18평 정도 되는 집에 6명이 모여 살았고, 아빠가 배관공을 하면서 나머지 5명을 부양하고 있다. 집에 딱 들어가 봐도 분위기가 우리가 가봤던 중산층 가정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엄청 행복해 보여서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장성한 자식이 5명이나 있는, 뉴욕에서 살아서 도미니카 기준에선 잘 살지만 뉴욕에서는 잘 살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사는 어린 딸이 있는 훨씬 어린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는 게 그냥 말로만 들으면 그렇게 호감이 가지는 않는다. 형편도 그래 보이고. 하지만 그거랑 행복은 진짜 관련이 없다는 걸 조이네 가서 느꼈다.


딸내미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울어서 7시쯤 집에 왔다. 가서 우리를 거의 한 번도 찾지 않고 신나게 놀았던 터라 단순히 피곤한 거겠지 싶었는데 역시나 오는 길에 아빠한테 업힌 채로 잠들었다. 우리 가족이 5시간 반이나 있었는데도 조이 가족들은 떠나는 우리를 아쉬워하면서 다음에는 더 일찍 오라고 신신 당부 했다. 도미니카에서는 손님이 오면 오늘 우리가 먹은 Sancocho나 염소 고기 요리를 자주 내놓는데 다음에는 염소 고기 요리를 해준다고 한다. 다음에는 꼭 12시간 금식하고 가야지… 진짜 배불러서 식겁했다. (초대를 받았으면 우리도 초대를 하는 게 예의인데, 우리가 이만큼 보답할 자신이 없어서 초대가 망설여진다, 어쩌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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