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474일 차
보드게임을 진짜 오랜만에 했다. 머리 쓰는 보드게임은 언제 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20년은 된 것 같다. 딸내미 친구 파이퍼네 아빠랑 남편 둘 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데, 그러다 보드게임 카페를 한 번 같이 갔고, 거기서 한 게임을 파이퍼 아빠가 사게 됐고, 우리 집에 어른들끼리 모여서 하게 됐다.
스플렌더라는 보드게임이었는데, 자원을 획득하고 그 자원으로 먼저 15점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자원과 점수를 효율적으로 획득하고 다른 사람을 견제도 해야 해서 꽤 머리를 써야 하는 게임이었다. 점수를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나는 1차적인 방법으로 점수를 만드는 것까지는 머리를 굴리겠는데, 2차적인 방법까지는 차마 머리를 쓸 수가 없었다. 내 머리의 캐파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ㅎㅎ
게임은 두 판을 했는데, 첫 번째 게임에서는 남편이 이겼다. 워낙 보드게임을 좋아하고,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굴러가는 편이라 그럴 것 같았다. 나는 꼴등을 했고 ㅎㅎ 나만 이 게임이 처음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 머리가 확실히 안 따라줬다.
두 번째 게임에서는 점수로는 공동 1등, 판정으로 2등을 했는데, 머리를 잘 썼다기 보단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머리 썼다고 피곤해서, 다들 애들 픽업하러 간 후에는 나는 낮잠 자는 둘째 옆에서 뻗어서 잤다. ㅎㅎ
미국인 친구들과 게임을 하면서 한국인의 특징 (혹은 나의 특징) 두 가지를 발견했다.
1. 보드게임 하는 시간도 아깝다.
이 게임이 재밌긴 했는데, 그렇다고 게임을 구매하자니 ‘이런데 에너지를 써도 되는 걸까…’하고 고민이 됐다. 여기에 쓸 에너지로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공부나 영어를 더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이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그런 생각은 한국인들의 특징적인 생각이라고 했다. 항상 효율을 추구하는 한국인들의 특징.
그런 것 같다. 나는 늘 ‘보드게임을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좋아하면 안 된다’ 였던 것 같다.
2. 남이 잘 되면 배 아프다.
게임을 하다가 누군가 큰 점수를 따면 나는 ‘으악’ 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파이퍼네 엄마 아빠는 ‘잘됐네!’라고 이야기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그럴 때마다.
사실은 나도 남이 큰 점수를 땄다고 대단히 아쉬운 것도 아니고, 파이퍼네도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도 아닌데, 사회적으로 훈련된 기본 반응이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마음은 내가 뱉은 말을 따라갈 거다.
이건 게임에 불과하고 재밌자고 하는 건데, 우린 왜 남 잘되는 걸 기뻐해주지 못하는 걸까. 이 것도 은근히 충격적이었다.
보드게임 자체도 재밌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나도 간간히 재밌는 보드게임 정도는 즐기며 사는, 남이 잘 되면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