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 이야기 1
소녀는 시골에 살았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에 어머니를 병으로 떠나보내고, 매일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남동생을 챙기는 삶이었다. 국민학교에 3학년까지 다닌 건 마을에서 제가 유일했기에 약간 우쭐하는 마음으로 동네 아이들에게 자랑삼아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기도 했다. 또래 아이들 대부분이 농사 일을 하거나 가족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소녀 또한 배움을 열망하지는 않았다. 단지 두 살 어린 동생의 입학식에 다녀온 날에 조금 쓸쓸한 기분이 되었을 뿐이다.
자상하게 챙겨주는 어른은 없었지만, 소녀는 제법 야무지게 자신을 챙길 줄 알았다.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얘기할 때마다 마을 어른들은 똑 부러진다 손뼉을 쳤다. 게다가 쌍꺼풀이 진하고 둥근 눈매와 작은 코, 새초롬하게 다물린 입술의 이목구비는 해마다 아리따워졌다. 거울속의 소녀가 싱긋 웃었다. 너는 꼼꼼하고 귀여우니 어디든 시집가면 잘 살겠다는 말을 안부인사처럼 들었다.
남동생이 국민학교 5학년에 진학하던 날, 아버지와 다툰 소녀는 씩씩대며 골목으로 나섰다. 사내의 배움이 계집애인 너보다 짧아서야 되겠니, 아무렴은. 아버지의 그 말이 마치 너는 태어난 순간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세 끼 밥을 짓고, 동생과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며, 집을 깨끗하게 잘 관리하다가 시집가서 다시 밥을 짓는, 그런 삶. 소녀는 그런 삶이 진저리 치게 싫었다. 모두가 저에게 똑똑하고 예쁘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는데, 꿈꿀 수 있는 게 고작 밥 짓는 삶이라고?
한참 골목길을 따라 걷다 도착한 곳은 대추 할머니의 대문 앞이었다. 다 무너져가는 담벼락 안쪽으로 앙상한 대추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평상에 앉은 등 굽은 할머니가 보였다. 뿌연 연기가 흩어진다. 소녀는 터벅터벅 걸어 평상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영순이 왔나."
"할매, 내 진짜 화가 난다."
"와."
"아부지가 행일이만 자꾸 공부시킨다 아이가. 내는 안 된다 칸다."
대추 할머니는 바닥에 카악 침을 뱉고는 짧아진 담배를 비벼껐다.
"내보고는 밥만 해란다. 사시사철 밥하고 청소해란다. 내는 그저 밥 하는 사람이다 이기다!"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녀는 공연히 발을 한번 쿵 굴렀다. 얕은 흙먼지가 날린다.
"내도 핵교 댕기고싶다. 돈도 벌고. 부자 되고 싶다."
"그라믄 영순이 니 시집갈래?"
"...할매. 무신소리고."
"조 앞 영덕할배 조카 내리와 있다 아이가. 친구랑 같이왔다카는데, 그 친구가 키도 크고 아주 훤칠한기라. 집도 억수 부잣집이라 카데."
대추 할머니는 돈 많고 잘생겼다는 영덕 할아버지의 조카 친구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밭이 몇 마지기나 있고 소도 있고 집도 넓다고 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돈 벌러 도시 나가 고생하는 것보다, 돈 많은 집으로 시집가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 훨씬 낫다고도 했다.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다. 안 한다. 내는 시골에서 안 살기다. 도시로 갈기다."
"그라믄 결혼해가꼬 도시에서 살믄 안 되겠나."
"남자가 좋다 카겠나?"
"왜 안캐. 좋다카지. 영수이만치 이쁜 아가 말하는데 지가 안 듣고 배기나."
"아 대따 마. 안 할란다."
"그라지말고 함 생각이나 해보라매."
"아니, 안 한다고."
그러나 애당초 소녀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여기서 밥하며 사나, 저기서 밥하며 사나, 이왕이면 부잣집 부엌이나 밟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쁘고 똘똘했던 소녀는 그렇게 열네 살의 신부가 되었다.
그 선택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후회하는 밤이 육십 년이나 이어질 줄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