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 소녀

엄마의 엄마 이야기 3

by SOME


노인이 된 소녀 앞에 어린아이가 앉아있다. 소녀가 뭣도 모르고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고르며 스스로의 똑똑함을 칭찬했던 딱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제 할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 눈빛도 저렇게 빛났던가? 저렇게 어리고 자신감 넘쳤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던가? 정녕 기억 속 여자아이가 자신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노인은 지독한 피로감에 찌들어있었다.


"그래서, 그래서요?"


아이가 다음 이야기를 채근했다. 벌써 십 수 번째 듣는 이야기이지만 들을 때마다 아이는 흥미로워한다. 이야기를 요구하는 발랄한 목소리에 노인은 더듬더듬 옛 기억을 살폈다.


"그래가꼬.. 마.. 첫째 낳고.. 그래도 아들 낳았다고 윽시로 좋아했제. 느그 삼촌을 지들이 들고 가서 물고 빨고 한다고 내한테는 주지도 않더라."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먼 기억이면서, 동시에 어제처럼 느껴지는 분노였다. 아들이었던 첫째는 꽤 자랄 때까지 한 집에 사는 제 어미와 얼굴조차 자주 보지 못했다. 엄마가 된 소녀는 지독한 허탈감에 시달렸다. 잠깐씩 젖 물릴 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밭에 나가 있어야 했다. 가끔 얼굴을 비추는 남편과 시어머니, 시누, 그리고 빼앗긴 제 아이가 따듯한 안방에서 까르르 호호 웃는 소리를 들으며 부엌 청소를 했다. 건강이 점점 나빠졌고, 감기인 줄 알고 쉬던 중에 또다시 배가 불러왔다. 둘째는 딸이었다.


"그기 느그 엄마 아이가."


"맞아요. 엄마랑 삼촌이랑 두 살 차이 나잖아요."


"느그 엄마 이름이 왜 점순이 됐는지 알제?"


"또 말해주세요."


"느그 엄마의 할머니가. 가씨나 낳았다고. 저거는 젖도 주지 말라고. 그 추븐데. 어? 십일월인가. 그 추븐데 갓 태어난 아를 고마, 주방에 가따 떤져놨다 아이가."


"아니, 주방에 애기를요!"


"그렇게 반나절인가 지나고, 내도 정신을 차리고 주방으로 슬슬 가보니까. 애기가 안 죽고 살아있더라고. 근데 울지도 않고. 억수로 차분 하이 가만있데. 처음엔 다들 죽은 줄 알았다아니가. 아 가 엄청 순하더라고. 그래서 느그 엄마의 할머니가, 이름을 순이라고 지은기라. 근데 보니까 몸에 점이 억수로 많아. 그래서 점도 많고 순하다꼬 점순이가 된기다."


아이가 푸스스 웃는다.


"가씨나 낳았다고 구박을 구박을... 어찌나 하던지 말도 못 한다 마. 지들도 고추 안 달고 났으면서 어찌나 괴롭히는지... 아 는 죽어라고 굶기제, 내한테는 미역국은 무슨, 밥 한 그릇도 안주제. 둘 다 굶어 디지라 이거지."


"할아버지는요?"


"느그 할아버지는 도시 나가서 일한다고 마, 얼굴을 자주 못 봤지. 내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여기가.. 심장이 콱 막히고... 숨이 안 쉬어진다. 그 씨발 것들. 다 잡아 죽이삐야되는데. 아..."


"그때 많이 힘들었으니까요... 그래도 이미 다 돌아가셨잖아요."


"아, 그래도 무덤이라도 파 디비고 싶은기라. 그 정도로 이기.. 이기.."


노인의 눈가 주름을 따라 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내리치며 가쁜 호흡을 한다.


"병원에서는 홧병이라 하데. 화가 억수로 많이 나면 병이 되는갑지? 홧병에는 약도 없다카던데, 복수하고 싶어도 이미 다 디지삐서 억울해가꼬 이래 눈물이 계속 난다아니가. 느그 엄마가 아가때 못 먹어서 지금 저래 작은기라. 젖을 물려도 아무것도 안 나오데. 쫄쫄 굶었는데 뭐시 나오겠나? 몇 날 며칠 몇 달을 애 붙잡고 울었는가 모르겠다. 굶으면서. 내는, 그때만 생각하면 숨이 칵 막힌다. 이래 시간이 오래 지나도!"


멸시받고, 무시당하며,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노예처럼 일해야만 했던 기억들이 뒤죽박죽 엉켜 눈물로 흘러내린다. 한참을 씨근덕대며 숨만 몰아쉬던 노인이 가까스로 진정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몸도 아프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고. 그래가꼬 느그 엄마가 다섯 살인가 됐을 때, 손 잡고 그 집에서 도망친기라."


"삼촌은요?"


"느그 엄마는 등에 업고, 삼촌은 손 잡고 걸려서, 할아버지 일한다는 도시로 무작정 내려갔지."


"할아버지랑 바로 만났어요?"


"만나긴 무신! 못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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