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 '건강한 가족' 교육을 듣고 느낀 점...
남편 없는 여자한테 자꾸만 남편 얘기를 하는것도 어찌 보변 무례다.
아이 학교에서 '학부모 연수'를 한다는 알림 톡이 왔다. '건강한 가족 관계'에 대한 두 시간짜리 강의였다.
'두 시간이라...'
마침 내가 일하지 않는 시간대였다. 짧은 고민끝에 참여 버튼을 눌렀다. 큰 기대는 없었다. '건강한 가족'에 대한 강의가 거기서 거기지 뭐... 서로 배려하고 존중할 것, 나쁜 말 하지 않기, 서로 사랑하기 그런 얘기 하겠지. 뻔할 걸 알면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일하는 시간과 겹치지 않는다면, 아들 학교의 행사는 참여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제법 찬바람이 부는 10월 아침. 스무 명의 엄마들이 초등학교 1층 강의실에 모였다.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여자 강사가 자신의 경험을 섞어가며 강의를 시작했다.
"... 그래서 서른 살 아들과 남편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겠어요! 자, 여러분도 남편과 자녀의 대화를 떠올려 보세요."
강의 내내 나는 두 가지 부분에서 놀랐다.
첫 번째는 강사님의 아들이 나와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남편과 아이'를 한 세트로 묶었다는 점이다.
나는 아이는 있는데 남편은 없다.
없게 된 지 꽤 되었다. 지금은 웃으며 말 할 수 있는 주제지만, 어쨌든 좋게 헤어진 건 아니었다. 요즘같이 이혼율이 높은 때에, 학부모 강의에서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은 걸까?
'아마 여기 있는 사람 중 나 빼고 최소 한 두명은 남편 없을 걸...?'
나는 삐딱해지려는 마음속 다잡고, 그냥 속편히 남자친구를 떠올려보기로 했다.
남자친구와 내 자녀와의 대화라...
말 수가 별로 없는 남자친구와, 입에 모터를 단 아들의 대화 모습은 쉽게 그려졌다.
대화 지분의 99%는 아들이 차지할거고, 남자친구는 조용히 응,그래 등의 반응 정도만 하겠지...
남자친구는 누구와 대화를 해도 똑같았다. 상대방이 주도하지 않으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타입이다. 다행히 나나 내 아들은 떠드는 걸 아주 좋아한다. 그나마 조금 더 어른인 내가 아들이 말하는 동안은 덜 떠들려고 애쓰는 정도다.
그러고 보면 아들과 나는 닮은 점이 참 많다. 외모는 전남편을 빼다박았지만, 그 이상으로 내면은 나를 빼다박았다. (그래서 난 아이가 전남편 외모를 많이 닮은점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내면은 나로 가득차있는거니까. 예전엔 얼굴이 안닮아서 서운할때도 있었지만...)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방향성도 닮았다. 나와 아들은 팩트에 집중한다. 누군가 '나 슬픈일이 있어서 빵 샀어'라고 물어보면 '무슨 빵?'혹은 '그래서 잘 해결이 되었어?'라고 고민없이 묻는 스타일이다. 누군가 영양가 없는 수다를 시도한다면 조금 짜증이 난다는 뜻이다.
강사가 이렇게 말했다.
"남편에게 하늘이 참 예쁘다~ 당신은 어떤 구름이 마음에 들어?라고 말을 걸어보세요. 그리고 대답에 귀를 귀울이세요."
나였다면 '진짜 어떤 구름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서'물었겠지만, 강사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대화에 물꼬를 트고, 친절하게 반응하고 경청할 것. 대화하며 상대를 비난하지 말 것. 뭐 그런 의미로 '구름'이라는 주제를 가져왔겠지. 나는 강의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아...'
...글렀다. 글러먹었다.
강사가 강의 도중 자꾸 '남편'에 대해 언급해서 기분이 바닥을 쳤다. 남편이 열심히 일하고 들어왔을때 따듯한 음식으로 맞이해주란다. '오늘 저녁메뉴는 뭐야?'라고 물을때 상냥하게 답해주란다. '맨날 똑같은거 먹지 왜 그런걸 묻냐'고 하지말라고.
나였다면 '저녁메뉴? 그건 니가 알겠지. 니가 지금부터 차릴거니까.'라고 했을텐데.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어차피 나는 이혼했고, 저녁을 차려줘야 할 남편도 없고, 남자친구는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퇴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말엔 대부분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치우는건 남자친구가 다 한다. 그는 내가 육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한다. 내 아이랑 완전히 남남이면서.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자식을 위해 그렇게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더욱 강사의 말에 집중이 안됐다. 자신이 선택한 여인의 몸에 자신의 정자가 들어가서 난 '친 자식' 아닌가? 그 '친 자식'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배우자를 왜 참아줘야 하나?
강의는 쭉 그런식으로 진행되었다. 남편에게 친절할 것, 시어머니에게 상냥할 것, 자녀에게 화내지 말 것.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는 그냥 사람이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다고 갑작스레 성녀로 변신하진 않는다. 저 강사는 '너만 잘하면 돼'라는 식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에게 고구마를 선사했을까. 심지어 이혼 전문 상담사라고 하는데... 강사에게 상담 받았을 내담자들이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요즘같은 세상에 그 강사의 말만 듣고 희생자를 자처하는 여자가 몇이나 있겠냐만은... 어쨌든 이런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을 아이 학교에서 특별 강의로 듣고 있다는게 좀 우스웠다. 나처럼 오후부터 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교육을 들으러 왔을수도 있는데, 자꾸만 '전업주부'에게 하듯 말한다는 점. 그리고 엄마,아빠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집을 기준으로 자꾸 설명한다는 점. 이런 부분들이 요즘 시대에 맞지 않다고 느꼈다.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있는데...
남은 시간동안은 냉소적인 마음을 겉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거나 무시하는 제스처를 취하면 실례니까.
남편 없는 여자한테 자꾸만 남편 얘기를 하는것도 어찌 보변 무례다.
강사는 무례를 저질렀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끝까지 강의를 경청했고, 편견으로 가득찬 강의에도 배울점이 있다는 몇가지 교훈을 얻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나는 어디가서 저러지 말아야지.'였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