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랑 썸 타는 남자

13년째 커피를 볶고 있다.

by Some Bassil

커피랑 썸 타는 남자


나는 햇수로 13년째 커피를 볶아 생계를 이어오고 있는 커피 로스터이다. 집중력이 좋으면서도 싫증을 잘 내는 나는 MBTI 인프제 유형이라 좋은 커피 로스터가 되기에는 성격상 경계선에 있다고 자체 판단을 한다. 싫증이라는 위험인자를 태생부터 가지고 있다 보니 어떤 일이든 천직으로 삼기에는 애초부터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무려 13년 동안이나 커피를 볶아 밥을 먹고살 수 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성질 더러운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이끄는 커피의 매력이 대단해서였던 것 같다.




커피와 나의 관계는 아주 오래된 밀당이다. 그 주도권은 언제나 커피에게 있었다. 철 모르는 나는 커피를 다 알아버렸다 여기고 이제 커피는 내 것이라도 된 것인 양 목에 뻣뻣이 힘을 주고 자랑질을 하고 다닐 때도 커피는 이렇다 말 없이 있다가 한 번도 맛본 적도, 맡아본 적도 없는 신비한 향미를 툭하고 던져준다.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아이고 미안하다 친구야 내가 아는 네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나는 언제나 너의 신비에 온전히 다가갈 수 있을까?'



물론 이런 과정에 내가 아무런 액션이 없던 것은 아니다. 커피 향미에 대한 깊은 고민과 기대들로 무언가 로스팅에 평소와 다른 액션을 취할 때는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미지수이고 미지수는 나의 영역이 아니다. 오로지 커피가 허락하는 영역이고 내가 가공한 이미지가 아니라 커피가 지니고 있던 커피의 다른 얼굴이다. 거짓된 인간의 페르조나와는 다른 오랜 관계 속에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은 얼굴이다. 내가 그제야 발견하고 대면할 수 있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전혀 몰랐던 또 다른 커피 본연의 모습이다. 이런 사건에 반응하는 내 감정은 자괴감보다는 경이로움이고 미움보다는 고마움이다. 커피는 내가 타고난 싫증 에너지를 다독여가며 지나온 시간의 기록들을 실력으로 바꾸어주는 내밀하면서도 강력한 훅이 있다. 멋지지 않은가?

나는 자주 커피를 사람이라 상상할 때가 있다. 커피, 그 또는 그녀가 아마 사람이라면 멋진 친구일 것이 분명하다. 그는 친구를 위해 가장 멋지게 썸탈 줄 아는 진중함이 있다. 그래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기를 알게 하고, 알아갈수록 더 깊어지며 오로지 말이 아닌 맛과 향으로 이야기하듯 커피하는 사람도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