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이 막 되었을 때 나는 그해의 숫자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해에는 왠지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혼자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봄이 채 다 지나기도 전에 나는 한동안 애정을 쏟았던 대상들을 자진해서 끊게 되었다. 그런 단호함은 이전의 나에게는 없던 모습이었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해 놓고도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충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깊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아이가 떠나고 내 인생은 초기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현재의 나는 여전히 이전의 나의 연속이었다. 바로 직전까지는 자의든 타의든 아이를 일 순위에 두고 희생에 가까운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대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으니 아마도 나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다시 채워야 했던 것 같다. 그것이 당장 새로운 아이나 유군이 되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 대상들은 현실이었고 현실이 될 것이었으니까. 이미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괴로운 현실 속에 있었으니 다시 현실의 것에 몰두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에서 벗어나게 해 줄 대상을 최대한 빨리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전혀 예상 밖의 곳들에 마음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들이었을까. 충분히 다른 대상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갑자기 그들이 내 앞에 나타났으니까요,’라고 한다면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새로운 만남은 대개 우연하니까.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들에게 품었던 내 마음에는 조금 다른 듯 비슷한 면들이 있다. 이를 테면 ‘저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인데(혹은 사람들인데) 쉽지 않아 보이네. 내가 좀 도와줘야지.’, ‘이미 유명하고 가진 것도 많고 능력도 있는데 왜 저렇게 외롭고 힘들어 보이지. 응원해 줘야겠다.’였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내가 많이 힘들었으니 그런 나의 마음을 곧바로 그 대상들에게 투영했던 것 같다. 섣부른 지레짐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부터 그저 나의 생각과 단정이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또 알아갈수록 실망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그 실망조차도 나 혼자의 판단이었다. 물을 수도 없었고 묻지도 않았다. 그런 식의 일방향의 감정이 어느 순간 바닥이 안 나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무엇인가를 애정 하는 마음을 동력으로 삼아 살았던 것 같다. 현재 내 삶의 힘이었으니 힘을 계속 내기 위해서는 더욱더 그 대상들에게 몰두할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때 그 순간 그 시간의 즐거움과 자기만족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면의 에너지가 소진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어떤 보답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으니 어느 순간에는 다 비어 버린 상태가 될 수밖에는 없었다.
갈수록 힘이 나는 게 아니라 힘이 드니 지금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시작은 설렘과 즐거움이었는데 지금은 원망과 미움이 되었으니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이다. 애초부터 모든 것들이 나만의 생각이었음을. 그들은 어떤 것을 위해 희생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도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던 것이었다. 그 삶에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짐작했다. 내가 미화하고 내가 이상화했으니 그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힘들면 스스로 놓아야 했다.
그동안 나 혼자 찾아가서 지켜보며 나 혼자 감탄하며 찬사를 보냈던 대상은 그저 더 이상 그 곁으로 가지 않으면 되었다. 이후에는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뒤를 잇는 감정들은 혼자서 천천히 정리하면 되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만나 함께 같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며 무엇을 했던 대상들은 좀 달랐다. 사과를 하기도 하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면 안 되겠냐는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힘이 다 빠진 나에게는 그런 것들마저 자꾸 무엇을 요구하는 것만 같아 밉게만 보였다. 자신들의 불편한 마음을 빨리 해소하려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받아들이는 것에는 나의 비뚤어진 마음 탓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힘을 내 보았다. 바닥까지 닥닥 긁어모은 힘으로 마무리를 했다.
그랬다고 해서 바로 모든 것들이 후련해지고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몰두하던 것들을 다 놓아 버리니 처음에는 헛헛하고 허전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이번에는 밖이 아닌 안으로 돌려 보았다. 그사이 텅텅 빈 것만 같은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보면 과거의 내가 너무 어리석게 느껴져 괴롭다 못해 스스로가 미울 때도 있었지만 그런 감정들조차 똑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열심히 내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바이러스로 반 강제적으로 타인과 접촉할 수 없게 된 것도 컸다. 남을 못 만나는 시간 동안 나를 계속 만났다. 관련하여 참고할 무언가를 읽기도 하고 또 쓰기도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이제 다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바닥이 났음을 알았던 그때처럼 어느 순간 말이다. 물론 바이러스가 아직 모두의 곁에 남아 있었지만 전보다는 많이 자유로워진 분위기였다. 그러자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간 소문만 들었던 동네 책방의 처음 뵙는 사장님께 제안을 받았다. 자신의 공간으로 나와 작업도 하고 모임들도 해 보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올해부터는 일주일의 많은 시간을 밖에 나와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물론 시작할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컸다. 전보다 괜찮을 자신은 있었지만 또다시 상처받게 되는 일을 덜컥 시작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몇 개월간 계속 이어지는 여러 만남들을 통해 어느새 충만해진 나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강해진 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에 대한 마음은 사람을 다시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오전에는 독서 모임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오후에는 어쩌다 책방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저녁 시간이 되어 버린 어느 날이었다. 그 와중에 잊지 않고 먼 곳에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유군과 함께 먹을 저녁거리까지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깨달았다. 예전에 바닥났던 내 마음은 이제 다시 꽉 차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가 되었음을. 나를 채우고도 남은 내면의 에너지들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정도가 되었음을. 몇 년의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기쁘고 감사했다.
물론 타인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귀 기울이고 생각해 보고 그것들을 다시 말로 표현하자면 많은 힘이 들어간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만 전과 달리 신기한 것은 분명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인데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꼭 하나씩은 언젠가의 어느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공감이 가고 이해가 간다. 또 꼭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 신기한 것은 그렇더라도 전처럼 과몰입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럴라치면 내 속에서 반짝하고 경고등이 켜진다. 너 지금 너무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너무 몰입하고 있다고. 그쯤에서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고. 남은 에너지를 가늠해 보고 다음을 또 기약하라고. 그러면 나는 이제 더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다 써 버리기 전에 잠시 멈추는 법을 그동안 조금은 익혔나 보다.
또한 이제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상상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의 삶을 지금 보이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이든 혼자 머릿속에서 꾸며대지 않고, 나는 절대 다 알 수 없는 어떤 부분들을 어림짐작하지 않고, 내가 알 수 있는 만큼만 바라보니 뜻밖에도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보였다. 상상이 아닌 현실이 주는 생동감, 각자 힘은 들지만 또 괴로울 때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모두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느낌.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전에도 매일 보던 풀 하나도 다르게 보인다. 저러다 곧 비바람을 맞기도 하겠지만, 또 그러다 결국 떨어져 버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분명히 선명하고 싱그러운 그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에는 그것들을 다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예상 밖에 좀 길어진다 싶었을 때는 너무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글도 그런 글만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좀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나를 채우고 다시 세울 수 있었던 소중한 멈춤의 시간이었다. 그래야 이렇게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도 되찾을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마음의 그릇을 비우고 또 채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더 튼튼하고 더 단단해지다 보면 그 크기마저도 커질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모두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훨씬 더 깊고 넓게 내 안으로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더 소외되고 지금 더 고통스러운 곳들까지 잊지 않고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글을 언젠가는 감히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