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어렸을 적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1/3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어머니랑 색종이를 접으며 그건 1/4이지-! 라며 저녁시간 내내 종이를 접은 적이 있다.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대충 접었는데 어머니는 그렇지, 맞다, 라고 하셨었다. 대충, 얼렁뚱땅. 어쩌면 나는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딴딴하지 못한 어린시절을 회고해본다.
지금은 수에 개념이 생겼지만 여전히 많고 적음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 그만큼 나는 돈에 무지하다. 당장에 쓸 돈이 급급해 살 만큼 미래에 대한 투자도 여유도 없이 살았다. 나는 내가 내일 당장 죽을 줄 알았지만, 인생은 모질었다. 산 입에 거미줄은 치진 않아서, 몸이 그래도 아프지 않고 정신도 약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7일 근무로 인해 나는 쉼 없이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 은혜에 감사하다.
나는 적은 사람들로 시작해 같이 걷기 시작했고 나는 이제 여러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나처럼 엎어지고 깨지고 없이 자란 숨죽여 우는 사람들을 끝내는 찾아내 같이 울 것을 약속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들고 일어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글을 모르거나 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녹음본도 올릴 예정이다. 나는 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모르는 것에 대한 미지의 호기심, 그리고 배우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나태함도, 내탓도 아닌 환경에 너무나 비참해서 많이 운 적도 있다. 내 후대를 위해 희생함을 알아달란 것도 아닌데, 내 사람들은 나의 안위를 걱정한다. 나는 배우기를 열망하나 시간이 여의치 않다. 먹고 사는일에 빠져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쪽잠을 잔다. 자는 시간 조차 꿈도 제대로 꾸지 못하고 쓰러져 잔다.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내 미래는,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어 단 한번도 이겨내 본 적없는 나를 일으켜 세워본다. 나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나를 보면 사람들은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으로 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똥통 대학에 나왔다면서 비난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남들보다 느리게 2009.3.-2017.8. 까지 다녀 끝내는 졸업을 했다. 공무원 시험과 학비로 인한 긴 시간이었다. 수천만원을 투자하고 남은 것은 고작 졸업장밖에 없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나는 지금의 세상이 이상이 살았던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오감도에 대한 느낌을 올렸다. 시를 맛보면서 그 시대 지식인들에게 사상이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충격여파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나는 되새긴다. 아, 도망치고 싶다. 이 지구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김삿갓처럼 살고 싶다. 외람되나 나는 홀로 걷는것이 맞으나 사람들이 뒤에서 나를 따르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여긴다. 행동거지 말 하나 조심해서 나는 그렇게 살았는데, 사람들은 나를 추어올린다. 도망갈 곳이 없다. 이 세대에서. 때로는 숨도 막힌다. 어쩌면 좋을까. 다들 톱니바퀴처럼 끼어서 사는데. 나라도 바늘처럼 끼인 물꼬를 터야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글을 적는다.
카카오톡 검열이 일어나기 전 나는 브런치에 입성했다. 어느 무렵쯤이었을까? 하고 많은 메신저 중 나는 브런치로 선택했다. 그럼으로써 내가 작가라는 타이틀로 활동 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나서 추가된 멤버십은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는 매체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글에 오히려 태클을 걸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의 글과 말은 모두 멤버십 없이 진행 될 것이며 나는 혹여나 작가 타이틀이 사라지고 사법적인 영향을 받을지라도 나의 길을 가되 사람들을 모두 살리는 방향을 택할 것이다. 나의 꿈은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서 그렇다. 나의 허황된 꿈과 미래와 열정을 가지고 그대의 자녀, 그 후대와 함께 나는 오발탄처럼 가고 싶다. 어디론가 홀로 갈 수 없다면, 한 명이라고 같이 가고자 간다면 다시금 일어나 책임을 다 할 것이다. 올테면 와라, 나는 바뀌지 않는다. 못 배웠을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