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부터 이번 주 수요일까지, 엄마 그리고 남편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이 먼저 일정을 마치고 돌아간 뒤, 엄마와 단둘이 남겨진 3일은 내게 단순한 여행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내가 평생을 걸쳐 두려워했던 거대한 존재가 사실은 얼마나 작고 연약한 한 인간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엄마는 자주 다리 아파했다. 30대인 나도 다리가 아픈데, 평소에도 무릎이 안 좋아 주사를 맞으러 다니는 엄마가 괜찮을리 없었다. 남편과 여행할 땐 다리가 아파도 계속 강행군을 몰아붙였지만, 엄마와 있을 때는 자주 쉬었다. 자주 오래 쉬었다. 1시간은 기본. 어쩔 때는 2시간이 넘어가기도 했다.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면서 엄마와 나는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각자 핸드폰을 보며 보냈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일상적인 장면이었지만 그게 우리의 여행이었다. 엄마는 AI로 만든 사연 컨텐츠들과 최근 시작된 주식 관련 강의들을 들었다. 한참을 보다가 듣다가를 반복하다가 졸음이 찾아오면 팟캐스트마냥 귀에 꼽은 이어폰으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잠을 잤다. 엄마의 쉼은 그런 모습인 것 같았다.
가끔 나는 지하철 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유튜브를 듣고 있는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때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매 맞던 기억의 공포를 심어주었던 그 서슬 퍼런 존재는 온데간데없었다. 그곳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존재조차 흔들리는, 이제는 많은 순간 딸의 눈치를 살피며 기대어오는 노년의 여성이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에는 '서글픈 행복'의 감정이 스치곤 했다. 엄마가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안도감과, 그 절대자가 이토록 작아졌다는 상실감이 뒤섞인 묘한 기분. 나는 비로소 내가 엄마를 무서워하던 그 어린 시절의 감옥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조건'을 확인했다.
여행 중 우연히 읽게 된 '렛뎀(Let Them) 이론'은 또하나의 강력한 주문이 되어주었다. 렛뎀이론은 다른 사람의 반응에서 나를 찾지 말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라는 간단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엄마가 여행중 식당에서 투덜거리거나, 외국인에게 한국말로 냅다 이야기를 하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례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한다고 해도 (이건 좀 과격한 예시다) 그냥 내버려두라고.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우리의 인식 자체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는 게 렛뎀 이론의 핵심이기 때문에 모든 걸 그냥 '내버려두는 것 부터' 시작하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여행을 끝내고 온 지금도 렛뎀이론을 생각보다 많은 곳에 유용하게 적용중이다) 늘 만나면 이틀에 한번, 아니면 2시간에 한 번 꼴로 서로를 할퀴며 싸우던 엄마와 내가 여행 6일 동안 한번도 싸우지 않은 건 렛뎀이론의 영향이 컸다. 내가 초래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발생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렛뎀이론의 주문이 발동했다. '그냥 내버려 두자.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여러번 그 주문을 사용하면서 깨달은 바도 있긴 했다. 그 주문은 역설적으로 내가 얼마나 타인의 인정에 목매며 살아왔는지를 거울처럼 비춰줬다. 다만 엄마의 행동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 내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일희일비했던 것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카톡방에 나를 같이 끼워넣어 놓고도 왜 우리 모두 아는 지인의 장례식장에 나만 쏙 빼고 참여했지?', '왜 나만 그 언니랑 일하지 못하는 거야?', '걔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렇게 톡 쏘아 붙이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대부분 일과 관련된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다른 사람의 행동들. 이런 것 모두 그냥 '내버려두기' 주문으로 상쇄시켰다. 근데 그 질문들을 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목매고 있었던 건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러든 말든, 사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나만 그들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친.. 아니 발버둥도 아닌 것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관계뿐만 아니라 업무적으로도 그랬다. 선배가 후배를 가르쳐주고, 그게 정도라는 이유때문에 나는 10년 넘게 일하며 나를 버리고 남에게 나를 맞춰왔다. 돈을 주는 사람이 갑이고 그 돈을 벌어가는 게 을이기 때문에 을은 갑이 원하는 걸 해야만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지나고 나니 을은 을도 갑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을 정도로 남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췄던 시간들. 칭찬받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아이의 마음으로 완벽을 연기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다시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유튜브 오디오를 들으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엄마를 보는 장면으로 돌아와보자. 꼭 렛뎀이론때문이 아니더라도 엄마와의 여행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1,2년 사이 일이 줄어들면서 반은 강제로 가족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낼 수 있게 됐는데, 또 이게 역설적으로 '사람이 사는 것 처럼 사는 느낌'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10년동안 가족끼리 여행은 커녕 제대로 얼굴 보며 사는 일도 없었는데, 그게 다 일이 바쁘기 때문에. 라는 핑계 때문이었다. 일이 바쁜 건 맞았다. 근데 가족과의 시간을 보냈다면 분명 지금 엄마와의 여행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들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10년 넘게 그들의 입맛에 맞춰주며 인정을 바라던 때보다, 엄마와의 5박 6일 동안 눈을 맞추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그런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한 나 스스로에 대해 자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인정이었다. 순간 나는 더이상 엄마도, 상사도 아닌 내 인정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인정 욕구의 방향을 조금 틀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거울 삼아 나를 찾던 시간은 이제 완전하게 끝났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번 나를 확인하기 위해 타인이라는 거울을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울에 비칠 나 또한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어딘가에서 조금씩 조각조각 모아온 희미한 파편 같은 내가 아니라, 그 누구의 인정보다 충만하게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과정이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여정이다. 나는 나의 이 결정을 전적으로 응원하며, 기꺼이 그렇게 되도록 나를 내버려 두려 한다(Let Me). 엄마와 타인의 인정을 받아 행복했던 나도 분명 나였겠지만, 그 틀이 깨진 지금 마주할 나의 민낯은 과연 어떤 빛깔일까. 타인의 만족을 넘어선 내 모습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머지않은 날 만나게 될 그 낯설고도 반가운 내 모습이 기대되어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