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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영 Sep 03. 2022

여름이 기울고

가을볕이 쏟아져 내린다

 아무리 냉장고를 뒤져도 고기와 두반장이 보이지 않았다. 낭패다. 마제 소바를 위해 기껏 사온 쪽파가 무색해졌다. 재료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음에 해 먹기에는 쪽파의 싱싱함이 아까울 지경이다. 맛은 덜하더라도 오늘은 기필코 마제소바를 먹으리라. 


 돼지고기 다짐육 대신 두부를 구워 으깨준 뒤 수분이 날아갈 때까지 약불로 볶아준다. 딱 한번 먹어본 마제 소바의 맛을 더듬으며 굴소스, 간장, 설탕, 고추기름을 넣어주니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 되었다. 우동면은 삶고 쪽파는 썰어준다. 김가루도 취향껏 준비한다.

 면을 가지런히 담고 두부와 김, 그리고 쪽파를 올려준다. 달걀노른자도 예쁘게 담아주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맛의 마제소바가 완성되었다. 맛은 좋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다. 꽤나 용감한 시도를 한셈 치고는 못내 아쉬웠다. 


 2주 후에는 출근을 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다른 의미로 '용감한 시도'를 했고, 그 결과 덜컥 직장인이 되었다.

"여전히 먹고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자기소개를 지울 때가 온 것 같다. 어떻게든 먹고살 길은 찾았지만, 행복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예감은 슬프게도 대부분 맞아떨어진다.

 이제는 행복을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맛있는 한 끼 식사로부터 찾을 수 있는 기쁨이 오래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낮에는 여전히 매미가 울어대지만 저녁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다. 내가 만든 마제 소바만큼 아리송한 맛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못해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휘두르는 날이 이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우선은 먹고살 길이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겠다. 회사 근처의 맛집이 나의 새로운 낙이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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