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찾아오면 늘 비슷한 감정이 맴돈다. 처음에는 공허함이 나를 휘감고, 그 뒤로 묘한 그리움이 스며들 듯 찾아온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잊힐 법도 한데, 문득 어느 순간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내게 남긴 흔적일 것이다.
내가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어느 날, 그녀는 불쑥 내 삶에 들어왔다. 어느 날 문득, 그냥 그랬다. 감정의 출발점이 대단하거나 극적인 장면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내 삶의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알았다. 나는 다시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랑이 너무나도 새로웠음을.
그녀는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말수 적고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나에게 웃음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조심스레 다가서게 만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았을 작은 디테일들조차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아침에 마주하는 햇살, 커피 한 잔을 함께 나누는 짧은 시간조차도 그와 함께라면 따뜻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내게 사랑의 단어를 새로이 가르쳐 주었다. 한 번은 내가 무심코, ”너는 무슨 향이 나.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향기? 나에겐 향기가 없어. 그냥... 아무 냄새도 안 나는 사람일걸. “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에게 향기란 것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아니, 내가 그녀를 향해 느끼는 감정이 향기 이상의 무언가라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래도록 내게 남아 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나고 나니 그 향기 없는 여운마저 사라진 듯했다. 향기가 없다고 했던 그녀의 말처럼, 이제는 내 기억 속에서도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나는 그 사실에 서서히 익숙해지려고 애쓰고 있다. 때때로 그녀를 떠올리며 아득한 공허함을 느끼는 순간도 있지만, 그 또한 지나간다.
그녀와의 시간이 짧지는 않았다. 우리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쌓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어느 날은 그녀가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를 찾아왔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에 들어섰던 그녀에게 내가 건넨 첫마디는 그저 ”괜찮아? “였다. 나는 그 말로 충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응, 그냥 네가 있어서 다 괜찮아. “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 내 옆에 누군가가 있음으로써 나는 더 깊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의 사랑도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아마 우리 둘 다 알았겠지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감정이 희미해진다는 건 어쩌면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떠나던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랬다. 마지막 인사는 특별한 말 없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더 이상 그전처럼 뜨겁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녀를 많이 기억하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분명히 눈앞에 그려지지만 예전처럼 선명하지 않다. 그녀의 목소리도 기억에 희미하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게 아프진 않다. 시간이란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시간이 흘러가면, 그 모든 것이 점점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날, 그 순간은 분명 나의 모든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그때의 사랑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와의 시간을 통해 나는 분명히 변했다. 사랑의 깊이를 배웠고, 사랑이 떠나가면 남는 감정도 배웠다. 이제 그 사랑은 나에게 더 이상 감정의 무게를 남기진 않지만, 내가 그때 느꼈던 순간들은 분명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녀는 말 그대로 향기가 없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향기 없는 사랑을 충분히 느꼈고, 그로 인해 조금 더 깊어진 나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