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나는 사랑이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너와 함께 있을 때는 모든 게 단순하고 분명했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 그저 웃고 얘기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되었다.
하지만 넌 세상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사람들 앞에선 늘 웃었지만, 그 웃음은 얇은 가면 같았다. 가면 뒤의 진짜 너는 세상을, 남들을, 그리고 자신마저 믿지 못했다. 그런 네가 나에게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줄 때,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았다. 너의 마음을 얻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억나? 우리 처음 여행 갔을 때, 부산의 해변에서 처음으로 속마음을 꺼냈던 그 순간.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우리는 모래 위에 앉아 조용히 파도 소리를 들었다. 그때 넌 세상에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이야기하며 말했다. ”나도 언젠가는 너를 떠날지도 몰라.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해. “ 네 말은 차가웠지만, 나는 그 속에 숨겨진 두려움을 느꼈다. 네가 떠날까 두려운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떠날까 봐 더 걱정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 순간 확신했다. 나는 네 상처와 불안까지도 감싸 안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 순수했고,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떠나지 않을 거라 믿었고, 나 또한 너를 떠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 우리‘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함께 많은 일들을 겪었다. 넌 점점 내게 마음을 열었고, 나는 그런 너를 보며 더 깊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주 엇나갔다. 이유도 모른 채 싸우기도 했고, 싸움이 끝나면 네가 정말 내가 떠날까 두려워했다는 걸 털어놓았다. 내가 수없이 약속했지, 널 떠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 말이 네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주진 못했다. 어쩌면 그건 내 몫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늦가을 어느 날, 우리는 다투었다. 별것 아닌 문제였는데, 오래된 상처처럼 곪아있던 거였다. 싸움은 격해졌고, 너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나는 네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너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나도 나를 믿을 수 없어. “ 네가 가진 불신은 세상을 향한 것처럼 보였지만, 어쩌면 그보다 깊은 건 너 자신에 대한 불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강해 보이기만 했던 네가,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그때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또 한 번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에게 상처받았으면서도, 끝까지 나를 밀어내려 했지만, 나는 그마저도 사랑했다. 그건 네가 사랑 앞에서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화해했고, 대화를 나누며 더 가까워졌다. 나는 네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치유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내가 네 옆에 있으면, 세상이 무너져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이 지나갈 거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우리도 결국 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에게도 이별이 찾아왔다. 그 순간은 한겨울의 찬바람처럼 느닷없이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 우리‘였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었던 시절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 시간 덕분에 나는 더 성숙해졌고, 진짜 사랑을 배웠다.
지금의 나는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비록 우리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완벽하지 않음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웠고,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통해 진정한 ’ 우리‘가 될 수 있었다.
이제는 네가 어디선가 잘 지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