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하곤 한다.
움직이면 바뀐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쉽지 않다.
어릴 적 나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는 걸 못 견뎠고,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살이 찌는지, 왜 무기력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움직이면 되잖아. 노력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어떤 순간들을 놓치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한 번 무너진 성실함은 다시 쌓기 어려웠다. 한번 멈추면 다시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왜 움직이지 않는지, 어쩌면 그들은 그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움직이면 바뀐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과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현대 사회는 대리 성취의 시대다.
우리는 누워서 작은 화면을 통해 세상의 성공을 본다. 핸드폰 속에서는 사람들이 꿈을 이루고, 몸을 만들고, 부자가 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살아간다.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면 당신도 변할 수 있다, 이 사람처럼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리 성취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현실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지?라는 자책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자책은 점점 무력감으로 변한다.
“나는 재능이 없어서 안 돼.”
“나는 애초에 시작할 능력이 없어.”
이런 말들이 핑계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들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끊임없이 곱씹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잔인한 말이 있다.
“일단 해봐. 그러면 변화할 거야.”
우리는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
단순한 결심만으로 삶이 바뀔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작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모른다.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영역이다.
누군가는 망설임 없이 시작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난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출발선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너도 할 수 있어.”
“노력하면 돼.”
정말 그럴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간극을 쉽게 무시한다. 그리고 그 틈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점점 세상과 멀어진다.
소외된 것들은 점점 더 소외된다.
움직이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더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멀어지다 보면 결국 남는 건 작은 핸드폰 화면 속에서 남의 성취를 구경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성공담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이 실패자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쌓일수록, 우리는 더 깊이 주저앉는다.
이제는 누가 우리를 패배자로 결정하지 않아도 스스로 패배자가 되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