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두어 달 사이에, 어느 틈에 세 군데나 되는 일터를 거쳤으나 정착할 곳은 찾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그만 포기하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나는 두드려 보지 않은 수많은 문들 앞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한밤중, 길 잃은 나그네가 낯선 마을에 겨우 도착하여 하나 둘 굳게 잠긴 문을 두드리는 심정이 닮은꼴일까. 잠긴 문들 중에서 길을 알려줄 문 하나쯤 나그네에게 열리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나 참 긍정적이다. 무모하리만큼 도전적이다.
문득, 2012년이던가 벌써 8년여 전의 일이 생각난다.
그 해에도 나는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아 헤매었다. 글쓰기에 지칠 때면 인터넷 검색을 하며 쇼핑도 하고 관심거리도 찾곤 하는데, 그 당시에도 항상 마음처럼 열렬하게 글쓰기에 매진하지 못할 바에야 그밖에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때는 시어머니도 남편도, 나도 한집에, 하루 종일! 물론 각자의 일상을 지내긴 하지만, 온종일 얼굴 맞대고 사는 게 몹시 힘겹게 느껴졌다. 내 일상의 유일한 돌파구라면 당시 9~ 10살 된 멋진 슈나우저 뤼팽이와 동네 주변코스를 산책하는 정도.
답답하고 무료하고 막막하기도 초조하기도 한 어느 날 불현듯, 가사도우미라는 직종에 관심이 생겼고 즉시 일자리를 검색했다. 가사도우미란, 옛날에는 식모니 가정부니 하는 용어로 일컬어졌던, 한 가정의 주부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처리해주는 직업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 집의 주부이고, 그러고 보니 나는 살림을 귀찮아하거나 게으르거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잘하는 게 청소요, 요리(라고 하긴 그렇지만 하자고 들면 반찬 만드는 솜씨도 나쁘지 않으니)요, 하니, 그 잘하는 걸 살려 돈을 벌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놀라운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나를 검증했다.
나는 그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일이 부끄러울까.
나는 힘이 센가.
나는 남편이나 가족에게 그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그 모든 항목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결론을 얻었다.
주부가 하는 일을 내 집에서 하듯 해주면 돈을 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쉽고 놀라운 일인가. 특별히 어떤 기술을 더 익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후 줄곧 해온 일이니 나만의 노하우도 있을 것이며, 살림을 싫어하지도 않으니 최고의 직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나는 힘이 세다. 물론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희귀 난치병을 2001년부터 지병으로 갖고 있으나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는 결론에 닿았다.
오히려 무기력하게, 지루하고 습관적으로 사는 하루하루가 더 소모적이고 부끄러울 뿐. 다만 한 가지,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하는가는 조금 고민되었다. 내 친정어머니와 자매들은 나의 결정에 대해 열광적인 지지는 아니라도 어떤 일이든 해보려는 나의 자세를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또 한 사람, 나의 큰 시누님 또한 응원군이 되어주셨다. 나의 결정을 남편에게 알리기 전에 나는 먼저 큰 시누님께도 이야기하고 응원을 구했다. 그녀 역시 나의 결심을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지지해주었다.
정말로 그 일에 도전하기로 결심을 굳힌 뒤 나는 구체적으로 조건을 탐색했다. 최소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게 가능하면 가까운 지역에서 자리를 찾으려 했다. 오가는데 버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우선 집 근처에서부터 가사도우미를 구하는 수요가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내가 잘 안다고 생각되는, 대중교통수단으로 한 번에 오갈 수 있는 왕복 1시간 이내의 거리로 검색 반경을 확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쌍방 간에 조건이 맞는 자리를 찾았다. 화, 목, 토 오후 1시 무렵부터 4-5시간씩 집안 청소와 빨래, 요청이 있을 때 원하는 반찬 만들어주기. 그리고 당시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딸내미와 중학생이던 장남의 하교 후 간식 챙겨주기 정도가 조건이었다. 그 가정의 주부는 남편과 함께 인근 번화가에서 떡집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 다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뻔히 집에서 늘 하던 일들을 해주고 시간당 1만 원을 받기로 했다. 당시의 공식적인 시급보다는 후하게 쳐주는 데다, 처음 일을 해보는 입장에서 격일제로 4-5시간씩만 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사도우미로 첫 출근하던 날에도 나는 남편에게 편지 한 장을 썼다. 그동안의 나의 고민과 상황인식에 대한 설득과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그럼에도 물론, 나의 최초의 육체노동 도전 의지에 남편은 당연하고도 충분히 황당해하며 뜯어말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때도 내가 이겼다. 그동안 그의 언행은 늘 최고의 지식을 갖춘 지성인으로서 공평하지 못한 사회현상에 분개하며 프롤레타리아적인 혁명사상가에 다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는 직업의 귀천을 그 누구보다도 따지지 않는 건강한 사고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정작 내가, 가사도우미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자 몹시 심한 충격이라도 받은 듯,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어가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내가' 그와 같은 결심을 하고 나섰을 때는 다른 어느 남편이라도 그럴 법 하지만, 표면적인 이유 외에도 자신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이면의 사유를 또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한편으로 충분히 그를 이해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결국은 너도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저 아이러니한 최고 지성의 편견이 안타까웠다. 어쨌거나 그럴수록 나는 더욱 열렬히 설득하여 끝내 그를 적당히 포기시켰다.
훗날 남편은 내가 가사도우미 일을 하던 그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감정과 생각을 모두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가 여전히 낯설었다.
내가 만약에 정말로 하루 밥값이 없어서 가장 절박한 심정으로 남의 집 살림살이를 도와주어야 했다면, 그야말로 나 스스로가 비참하고 괴로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턴가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으로 나아왔을 뿐이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직업이 있으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내가 글 좀 써봤다는 이유로 평생 글만 써야 한다면, 그 다양한 일들을 경험해보지 못한다는 것
사실이 안타깝기까지 했다.
뭐, 너무나 천재적이어서 펜만 잡았다 하면 예술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출간만 했다 하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그야말로 그 재미로라도 더 열렬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나 스스로가 어쭙잖은 글재주에 손이 묶여 이도저도 아닌 싸구려 글줄이나 남발하며 그마저도 돈으로 환산하기 바빠 전전긍긍할 바에야 쿨하게 손을 털고 시야를 확장해볼 만도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오늘 하루하루의 촘촘하고 땀내 나는 경험들 하나하나가 내 삶을 그저 비껴가지는 않을 것이며,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 물방울이 돌덩이에 구멍을 내듯이, 내가 밟아온, 나를 관통하는 모든 시간들은, 그 선명한 흔적을 내 몸과 정신에 틀림없이 새겨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2020년 오늘 바로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으니 나는 그저 도전하고 시도를 이어갈 것뿐이다.
모든 일들은 처음이 참 어렵다. 그럼에도 첫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을 뿐, 일단 한발 디밀고 나면 쓰러지지 않고 어디 한번 제대로 걸어보자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나는 내 집안일처럼 성실하게 일했다. 그 집의 주부는 나보다 한두 살 아래였는데, 하루 종일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기 때문인지 얼굴을 보게 될 때면 대체로 늘 지쳐 보였다. 주부가 상주하지 않는 가정의 구석구석은 생각보다 찌들고 묵은 때가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 의아한 점은, 그 집에는 그동안에도 늘 가사도우미가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저기 들추는 곳마다 해야 할 일이 끝이 없게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내가 쓸고 닦아야 할 부분이 많은 게 참 다행스러웠다.
일이 낯설지 않다 해서 힘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가사도우미로 일한 9개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했다. 시작할 때는 한 3년쯤은 버텨보고 싶었는데, 나의 궤양성 대장염이 문제였다. 약 잘 먹고 매일 밤 좌약을 쓰는 등 관리를 잘하면 1-2년 정도는 관해寬解상태가 유지되는데, 그러다가도 뜬금없이 어느 날 갑자기 악화되는 상황이 반복되곤 했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가사도우미로 일한 지 8-9개월째 되던 무렵, 조금씩 출혈 증상을 보이며 다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궤양성 대장염의 특징적인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점차 심해지다 보면 나의 활력活力곡선은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이를테면, 아무리 오래 충전을 시켜도 금세 방전돼버리는 수명다된 배터리처럼, 처음과 달리 하루하루 빠르게 방전되어가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불쑥 '지친다'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나는 지쳐갔다. 결국 최초의 도전은 거기서 멈추어야만 했다. 매일 아침 변기에 앉아 출혈의 기미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기에. 곧바로 집중치료에 들어가도 다시 호전될 때까지는 빨라도 3-4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내가 2001년도에 진단받은 궤양성 대장염은 완치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난치병이다. 현재는 완치되는 경우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 경우 진단을 처음 받던 당시만 해도 '완치는 없다, 평생 안고 가야 한다'는 소견을 의사에게 들으며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어느덧 20년 가까이 그 병과 함께 하다 보니 이제는 적응력도 생기고 꽤 오랫동안 관해 상태를 유지하기도 한다.
사실 ,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시기에 나는 한편으로는 가죽가방 디자인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남편과의 일종의 딜이었다. 가사도우미로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 남편은, 내가 다른 어떤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다면 그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주중 3일은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다른 하루는 그 당시, 역시 새로운 관심사였던 가죽가방 다자인& 제작과정을 배우기 위해 왕복 3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공방에도 다니고 있었다. 가죽가방 디자인 수업 역시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공방까지 오가는 거리 하며, 하루 5-6시간 동안 수업을 받으며 소재를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충분히 재미있는 일이지만 동시에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같은 시기에 두 가지 새로운 도전을 동시에 진행한 것이 전혀 부담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할 뿐이다.
아무튼 생각보다 빨리 가사도우미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나는 좀 아쉬웠다. 다만 순수한 의미의 땀의 결과라는 면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언니에게도 빚진 돈이 좀 있었던 나는 그렇게 번 돈으로 몇 달만에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일한 만큼 바로바로 정확히 들어오는 월급! 어쩌면 바로 그 당시에 나는 고정적인 월급여의 확실성을 결혼 후 처음 확인하고 검증한 것일지도 모른다.
2012년 가사도우미로 나설 때, 남편뿐 아니라 모든 가족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낸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나의 지지자들이다. 물론 친정 어머니는 좀 더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셨으나 어머니의 강인한 생존력을 이어받은 둘째 딸은 그 어느 자녀보다도 다이내믹하고 도전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그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내 스스로 삶을 조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조각품으로 삶이 완성될지는 알 수 없다. 지금도 그것은 베일에 싸여있고 어떻게 다듬어질지 나 스스로조차 짐작도 할 수 없다.
인생은 굽이치거나 휘몰아치고 때로는 한없이 무료할 만큼 평화로운 시간들이 뒤섞여 이어진다. 폭풍우 속에서는 평화로웠던 지난 시간이 그리워진다. 한없는 무료함 속에서는 또한 나의 심장을 뛰게 할 어떤 것을 꿈꾼다. 나는 몸소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뿐이다. 나의 시간은 그렇게 알 수 없는 미래와 이어져있다.
2019년 2월 하순 어느 날, 사탕공장에서 달랑 5일 만에 알바 대기 통보를 받은 뒤 나는 다시 길 위로 나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