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아를

아를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그날의 공기에 대하여

by somehow

그날이 언제였던가.


아득하기도 하고 어쩌면 바로 어제이기도 한, 우리의 시간.


불행히도 나는 지금 아주 멀리 이곳에 있으나 나의 가슴속에 비수처럼 깊게 꽂힌 그 일주일 남짓한 시간의 기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가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얹은 것은 2010년 8월 16일. 그 후로 9월 30일 인천공항에 되돌이 마침표를 찍기까지 45일 남짓한 해외여행은 결혼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프랑스 남부의 아를은, 파리를 시작으로 프랑스 이곳저곳과 이탈리아의 몇 군데를 버스와 TGV와 지하철과 튼튼한 두 발로 누비는 여정 중에 한 곳에 불과했으나,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매우 특별한 감흥으로 기억된다.


카페 반 고흐_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 속으로 들어간 듯. copyright ⓒ 2010 somehow
심야의 카페 반 고흐_copyright ⓒ 2010 somehow





그중에서도 물론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의 장소는 나 자신을 그 옛날 고흐가 살아 숨 쉬던 순간으로 데려온 느낌으로 설레었다. 그림 속 '밤의 카페' 자리는 여전히 반 고흐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카페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존재했고 밤이 깊어갈수록 짙어지는 향취에 설렘은 더해갔다.

값비싼 요리와 적당량의 알코올에 취하는 우리에게 그것은 어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급한 '추억 팔기'가 아니라 '유적지 보존'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150여 년 전 온몸을 불살라 그림을 그리고 마침내 불멸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된 사나이가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아를의 생명력 때문이 아닐까.







아를 정신병원_현재는 '번역가들의 숙소' 뜰이다. copyright ⓒ 2010 somehow

아를에서 우리가 묵었던 '아를 정신병원', 즉 고흐가 살아있을 당시 정신병에 걸려 몇 차례 입퇴원을 반복했던 바로 그곳이다. 현재는 번역가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다.

국적에 상관없이 번역가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숙소와 도서관 등을 빌려준다. 원하는 번역가는 누구나 한두 달에서 수개월씩 그곳에 머물며 번역 작업을 할 수 있다는데, 번역가인 남편 덕분에 나는 그와 함께 아를에 머무는 며칠 동안 숙소를 이용한 것이다.

이 곳 역시 그 옛날 고흐의 그림 속 정신병원 뜰의 풍경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조성되고 관리되어 있어 적잖이 놀랐다.


아를_도개교 copyright ⓒ 2010 somehow


고흐 作_도개교 copyright ⓒ 2010 somehow


아를 며칠째인가, 도개교를 찾아갔다. 그 시절에는 부지런히 열고 닫히며 충실히 제 역할을 해내었을 나무로 된 도개교는 이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 묵묵히 하늘을 향해 열린 채 서 있다.

그 곁에는 당연히 고흐의 작품 '도개교' 카피 본과 설명이 적힌 패널이 서있다. 아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이제는 고즈넉하기까지 한 도개교를 보러 오는 이들을 위한 배려이다.


도개교 앞 두 사람_아를 copyright ⓒ 2010 somehow


고흐의 그림 속 도개교는 마차를 위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리 아래 물가에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도 표현되어있다.

고흐는 다리가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을 그려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백 년도 훨씬 지난 어느 해 여름 이렇게 그의 그림과 그림 속 현장을 직접 내 두발로 찾아가는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한 적이 있던가.

뜨거운 햇볕 아래 선 나는 문득 그의 그림과 그림 속 도개교를 보는 나 자신이 무척 신비롭게 느껴졌다.

나는 곧 생생하도록 그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나는, 백 년도 훨씬 지난 어느 해 여름
이렇게 그의 그림 속 현장을 직접 내 두발로 찾아가는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한 적이 있던가.

현재를 살지만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순환하는 시간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백오십여 년 전 그가 머물던 자리에서 내가 이렇게 서성이는 것은 아직 그의 숨결이 거기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를을 떠나는 새벽_copyright ⓒ 2010 somehow


나는 저 그림 속을 걸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림이 아닌데 그림 속을 걷고 있어.

새벽, 론 강변_copyright ⓒ 2010 somehow


아를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날의 새벽. 우리는 론 강변을 따라 걸어갔다. 그날의 느낌은 지금까지도 그저 신비롭다라고만 겨우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저 그림 속을 걸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림이 아닌데 정말 그림 속을 걷고 있어, 나는, 우리는."

사진의 풍경은 무척 아슴하고 몽롱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느낌이나 가공된 기억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묵묵히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나아가는 남편의 뒤를 좇는 내내 생생하게 실감한 공기의 흐름에 다름 아니었다.

론 강변의 멋진 가로등 빛을 밟으며 걸어갈 때 나는 그저 그림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우툴두툴한 돌바닥을 울리는 트렁크 바퀴소리가 현실임을 증명하지만 틀림없이 우리는 새벽어둠 그림 속으로 몽롱하게 걸어 들어가 천천히 아를 역에 이르렀다.


떠남_아를 copyright ⓒ 2010 somehow


그리고 우리는 아를을 떠났다. 그렇게....

그로부터 7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아를에서의 일주일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지낸다.


아를의 햇볕은 따가웠고 가끔 은은한 바람이 불어왔으며
그 새벽의 공기는 마법처럼,
나의 심장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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