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h My Life

지나간, 꿈_1

_첫 번째 꿈

by somehow

살면서, 우리는 여러가지 꿈_소망을 갖게 된다.

그중에서도 최초의 을 이루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처음의 바람 그림 잘 그리는 사람, 화가가 되는였다.


국민학교시절, 1학년 때인가 소년한국일보주최 전국어린이 미술대회인가...뭐 그런 대회에 나갔는가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조차 부재하던 그 시절, 나는 그림을 그렸던가보다.

그리고 좀 큰 상을 받았던가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는 그 뜻깊고 중요한 순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 당시에도 그렇지만, 어느날 문득 정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 대회의 수상을 증거하는 상장과 배지가 눈에 띄었고 집안에 뒹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상장들은 그 까마득한 시절, 이발사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아버지와 근처 시장의 점포에서 일을 받아와 작은 방안에서 한복짓는 일을 함으로써 생의 방편을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머니의 소박하고도 보잘것없는 세간살이 중 하나였던 장롱 위에 고이 간직되었던 것 같다.


그 희미한 시절, 나는 그림그리는 것을 정말 좋아한 것같다.


국민학교 1학년이 끝나기 전 겨울방학 때,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바로 이삿날, 나의 머리속에는 플래시가 터지며 찍힌 스냅사진처럼 충격적인 몇 장면이 각인되었다.

트럭에 변변찮은 가재도구들을 옮겨 싣던 짐꾼들이 어느 순간 장롱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불현듯 먼지쌓인 장롱 머리 위에서 손에 잡히는 몇장의 하얀 종이 상장들.

짐꾼들은 갑자기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북북찢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삿짐을 트럭에 고정시키는 어떤 도구로 사용했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들의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볼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조금 도톰한 종이조각, 작업에 유용한 소모품에 불과했나 보다.

어린 나는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것을 항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허름한 살림살이가 실린 트럭의 운전석 옆자리에 끼어앉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르팍 위로 동생과 함께 포개어 앉혀진 나는 서울로 황망한 길을 떠났다.



서울에서 자라 이제 늙어가는 오늘에도 상장들이 찢겨져나가는 그 처참한 장면은 간간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처음에는 상장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고 나의 그림실력을 증거할 것이 없어진 것같아 아쉬웠으나, 나에게는 배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시절, 나의 옷깃에 종종 매달려 자랑스레 학교에 다녔다.


어린 나는 그림 잘 그리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서울로 전학을 와서도 나는 그림을 좀 그렸다.

그 시절의 미술시간, 학교에서 종종 요구하던 '잊지 말자, 6.25', 혹은 '불조심' 등의 주제로 포스터를 그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머리속에 출렁이는 아이디어로 멋진 포스터를 그려내었고 그것은 당연히 교실 뒷쪽에 자랑스레 전시되곤 했다.

나는 미술교육을 학교 이외에서는 따로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이 눈여겨보며 감탄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5학년즈음 어느 날인가는 담임선생님이 어쩐 일인지 결근을 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수업시간에 들어왔었는데, 마침 미술시간에 들어온 어떤 남자 선생님이 있었다. 그분은 미술시간이니 그림을 그리라면서 교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반아이들은 열심히 선생님을 흘낏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물론, 소묘냐 데생을 따로 배워본 적 없는 나도 선생님을 그렸다.

얼마후, 시간이 종료되고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성과를 확인하던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야, 기똥차다! 정말 똑같이 그렸네!"


그러면서 그는 자신과 똑같이 그려진 나의 그림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것을 칭찬으로 들었다. 반아이들 모두 감탄과 부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림과 선생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 선생님과의 미술시간 일화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저 인상적인 한마디가 그날 내 머릿속에 들어와 강렬하게 박혔기 때문이다. 그후로도 나는 종종 그의 감탄어린 표정과 그 대사를 떠올리며 내심 흐뭇해하곤 했다.


그런 만큼 나는 그림 그리는데 점점 자신이 붙었다. 특히 6학년즈음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을 모아 미술실 같은데서 따로 방과후 특별수업을 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시간이 자랑스러웠고 당연히 장래에 그림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6학년이 끝나갈 즈음, 겨울방학 직전이었던가...

담임선생님이 藝中[예술중학교]에 갈 사람은 자신에게 얘기를 하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집에 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그러냐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나는 다음날 선생님에게도 예중에 가고 싶다고 말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예술중학교에 가지 않았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아무도 나의 생각에 귀기울이거나 존중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예술중학교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자식의 재능을 뒷받침하여 화가로 만들만큼의 여력이나 관심이 당신들에게는 없었다.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울로 이사온 지 5~6년 남짓된 부모님의 서울살이는 내 짐작보다 훨씬 팍팍하고 고달픈 것이었으리라.


그후로 나의 중고등시절은 팍팍했다. 중학교에 갔을 때, 국민학교시절 '그림 좀 그린다'는 소리 좀 들은 나는 당연히 특별활동으로 미술반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나따위는 명함도 꺼내지 못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 많았다. 이미 미술학원이란 데를 다니거나 다녀 본 경험이 있는 경우도 흔했다.

나는 그들처럼 세련되고 유려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4B연필도 붓한자루도 마음대로 놀리지 못할 만큼 자신이 없어졌던 것같다.

그래서인지, 공부도 그저그렇고 좋아하던 그림에서도 더이상의 재능발휘를 하지 못하는 나는 평범하다 못해 의기소침하고 더욱 내성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훗날, 경제적 능력이 생기자 그림공부를 다시 해볼 생각도 했었으나 더 이상의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나로서는 최초의 좌절이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같다.

어쩌면 정말로 딱 그이상의 재능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일지도 몰랐다.



지나간 꿈은, 이루지 못했기에
남아있는 아쉬움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도록 여전히
낡은 깃발처럼 기억 속에서
종종 나부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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