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일 때마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우면서도 골절은 예상하지 못한 어머니는 그날 아침에도 주간보호센터에 출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나는, 센터장과 직원분들께 부탁을 드렸다.
낙상사고를 겪으셨으니 병원에 모셔가서 골절여부를 확인하고 통증을 심하게호소하면 조기에 집으로 모셔다달라고.
오후에 연락이 왔고, 역시나 어머니의 갈비뼈는 골절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날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어머니는 갈비뼈의 통증때문에 바로 방문옆에 있는 화장실에 오가는 것도 고통스러워했다. 뿐만아니라 어쩐 일인지 다리의 힘이 급격히 저하되어 혼자서는 더이상 일어서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밤새, 남편과 나는 어머니를 화장실로 왕복시키느라 잠을 설쳤다. 물론 예비로 기저귀를 착용시켰음에도 어머니는 멀쩡한 정신으로 기저귀를 적시는 일을 극도로 꺼려하셨다.
8월23일
날이 밝았으나 나는 회사에 결근을 할 수는 없었기에 언니에게 부탁했다.
아무래도 현재 상태로 보아 어머니에게 입원이 필요할 것같다고. 그러니 미안하지만 언니가 와서 입원절차를 남편과 함께 밟아달라고.
그렇게 해서, 9월3일 퇴원까지 어머니는 11일 동안이나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하여 이것저것 조사하던 중에 신우신염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입원하여 신우신염을 치료하고 거동을 최소화하여 금간 갈비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같았다.
문제는 아직도 코로나때문에 간병인 외에 가족들의 면회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입원 다음날에야 간병인이 오게 될 상황인데 그때문에 입원 당일에는 남편이 병실을 지키게 되었다. 다음날에도 출근을 해야는 아내대신 자신이 간병역을 하겠다는 남편의 배려덕분이었다.
그러나, 병실을 지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머니가 밤새 화장실을 오갈 경우 홀로 이동보조가 불가능하고 뒤처리 등을 돕는데 애로가 따를 것이었다. 혹은 기저귀를 채우더라도 그것을 갈아주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이 따랐다. 그래서 간병인이 올 때까지만 도뇨관을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남편이 환자옆에서 지킴이 역할을 하더라도 화장실문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도록, 언니가 조치를 취해놓고 돌아갔다.
다음날 간병인이 왔고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다...
더 큰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간병인이 왔으니 도뇨관을 바로 제거했어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가족들이 도뇨관 제거를 몇번씩 부탁해도 그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어머니는 도뇨관을 삽입한 상태로 일주일 넘게 누워만 있어야했다...
가족들의 원래 계획은 이랬다.
간병인이 오는 대로 도뇨관을 제거하고,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을 오가도록하거나 혹은 갈비뼈 통증때문에 거동이 어렵다면 기저귀를 이용하고 간병인이 그것을 관리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체력이 회복되면 조금씩 걷기운동도 시켜서 신체활력을 되살려 주기를 요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루이틀 도뇨관 제거는 미뤄졌을 뿐더러 그사이 간병인은 환자의 상태 호전을 위한 어떤 특별한 노력없이 옆에서 밥이나 먹이고 양치질을 돕는 일만 했던 것같다.
참 미안하지만, 간병인은 보호자들의 면회가 거의 불가하다는 상황을 이용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의혹이 일었다....힘들고 귀찮은 기저귀 갈아채우는 일이나 혹은 애써 환자를 부축하여 화장실에 오가도록 돕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꼼수를 부린 것은 아닐까....
결국, 퇴원하루이틀전에야 도뇨관이 제거되었다. 그러는 사이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만 지낸 어머니의 신체활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염증수치가 매우 높았던 신우신염도 거의 치료되어 퇴원해도 될 정도가 되어 9월3일에 퇴원을 하게 되었으나 어머니의 두 다리는 이미 거의 힘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퇴원다음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간병인의 도움으로 스스로 혼자 걸을 수 있도록 활력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이유는 퇴원 후 우리집, 어머니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퇴원 당시 어머니는 거의 홀로 걸음을 뗄 수 없는 지경이었으므로 24시간 간병인이 붙어있거나 가족중 한사람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갑작스런 배앓이로 응급실을 두군데나 쫓아다녔던 나의 건강상태를 우려한 가족들은 결론적으로 언니에게 어머니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직장이나 건강문제 등으로 당장의 나는 도저히 어머니의 회복을 도울 수 없는 상황, 남편은 집에서 일하지만 현재와 같이 홀로 화장실에 못 가는 장모님의 용변뒷처리를 돕는 일은 당사자인 어머니는 물론 그누구도 바랄 수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퇴원후 곧장 언니집으로 이동했다.
나와 남편이 필요한 짐들을 우선 챙겨 모시고 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몹시 힘들어하셨다. 퇴원은 했으나 신체활력은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짧지않은 시간동안 흔들리는 승용차가 울렁증을 유발하는 듯 괴로워 몸부림을 쳤다. 나중에 알았는데, 혈압이 너무 높았던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언니집에서 며칠후 또다시 응급실에 가야만 했다.
혈압이 조절이 안되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처방을 받아 돌아온 뒤로 어머니는 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물론, 어느새 70세가 된 언니가 어머니의 병구완을 맡기로 결정한 것은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었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린시절, 어머니와 헤어지고 당신의 보살핌을 제대로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좌절과 역경속에 성장하는 동안의 고통은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 늙어가는 오늘에서도 가슴 깊은 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아로새겨져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천만다행으로, 인생초년의 고난을 보상받듯 생의 중후반은 부족함없는 삶을 영위하게 되었으나 건강면에서는 또한 늘 고통을 껴안고 지낸다. 언니의 건강상태가 그토록 온전치 못하기에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끝까지 내 몫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점에서 있어서 나는 언니나 오빠에게 아무런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뜻밖에도 불현듯, 느닷없이 거동조차 힘겨운 어머니를 갑작스레 떠맡아준 언니에게 나는 한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어머니가 다시 활력을 되찾으면 내게 돌아오시리라 믿는다. 차라리 나는 그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추석을 하루 앞둔 9월9일, 나는 어머니를 만나러 서울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언니는 형부와 함께 지방의 시댁에 다녀와야 했으므로 하룻밤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고 당연히 내가 맡기로 했다.
퇴원후 일주일여 만에 만난 어머니는 병색은 있으나 서서히 회복중이었다.
추석전날, 길이 막힐까싶어 아침일찍 길을 나섰다_한적한 자유로
추석 전날_강북강변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
내가 언니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2층에 있는 방안 침대에서 스스로 일어나 워커를 밀고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물론 기저귀를 차고 있음에도 어머니는 화장실에 가려고 노력한다. 언니집에서의 일주일여 시간동안 초기에는 밤새 기저귀를 여러 장 적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신만은 항상 또렷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이번에도 머지않아 훌훌 털고 일어설 것을 믿는다.
그럼에도 이번 일을 겪으며 우리딸들은 어머니를 요양시설에 보내야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훌훌 털고일어난다해도 끝내 어머니는 누군가의 상시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인한 거동의 불편과 배변기능의 문제악화 등이 그렇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입원하신뒤 언니와 나는 요양원 답사를 했다.
지난해말, 요양보호사 수업을 들었던 학원의 원장님이 운영하시는 요양원인데 'ㅍㄹㄹㅅ너싱홈'이라는 그곳은 주위에 흔한 요양원과는 조금 다른 지향을 가지고 운영된다고 했다. 그곳은 원장님 자신이 간호학박사로서 단순히 인생의 종착지를 향해 가는 막차 탄 노인네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로서의 요양원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즉, 간호(看護|nursing)라는 의미[다쳤거나 앓고 있는 환자나 노약자를 보살피고 돌봄]를 내포하는 진정한 요양療養[휴양하면서 조리하여 병을 치료함]을 실천하고자 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가정과 같은 분위기라는...사실 '가정'과 '가정과같은 분위기'는 분명히 다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을 모아놓고 사육하듯 단순히 먹이고 기저귀갈아주기나 하는 곳이 아니기를 바라며 시설을 둘러보았다.
본래 더 작은 규모였던 그곳은 입소를 원하는 대기자가 많아져서 인근에 새로 확장하여 건물을 지어 올렸다. 내가 처음 그 너싱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운영자인 원장님의 신념에도 관심이 갔지만 30~40명 정도의 작은 규모라는 사실이 더 좋았었다. 그러나 확장이전한 그곳은 4층정도의 크고 넓은 규모로 자그마치 100명까지도 수용가능하다는 점은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만큼 노인인구가 많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결국, 이름과 모토는 제각각일지라도 '노인수용시설'이란, 늙고 병들어 더이상 가족에게도 사회에도 쓸모가 없어진 노인들이 죽음을 기다리기 위해 등떠밀려 수용되는 곳에 다름아닐 것이다.
언니와 나는 그곳의 시설들을 둘러보고 돌아나오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시에는 당장이라도 가족중 누구도 어머니를 돌보기 어려워지면 그런 시설에 보낼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시설을 돌아보고 나온 뒤, 언니가 일단 당분간이라도 어머니를 돌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다시 신체활력이 돌아온다면 조금이라도 더 우리곁에 어머니가 함께 계실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