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말의 결핵확진 후 혼란과 두려움 속에 2주간의 금족령 기간이 끝나가자, 나는 다시 헝클어진 일상을 추스르고 싶어졌다. 결핵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니 천형이라도 받은 것처럼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6개월을 보내기는 싫었다. 물론, 여전히 가방 한쪽에 담겨있는 숙제를 해결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하던대로 매일 새벽시간에 쪼개어 풀어나가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다시 워크넷을 뒤지고 해를 넘긴 이력서에 날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실토하건대, 나는 결핵으로 인한 2주간의 금족령 기간에도 '앞으로 다시 취업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으로 적당한 구인공고를 볼 때마다 전화를 해대었다.
그리고 남편도 모르도록, 은밀하게 면접을 보러 다녔다.
남편은 이참에 아예 집안에 들어앉게 되기를 바랐다. 돈때문이라면 앞으로 따블로 벌어줄테니 그러라고 꾀었다.
돈 때문인가, 오로지 돈 때문인가?
그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오로지 돈 때문은 아닌 것이다.
생산현장에서 하는 일들이란 또한, 언제든지 내가 아니면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는 단순 노동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예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거기에는 글을 쓰면서 얻는 성취감과는 또다른 성취감이 있다. 그것은 성실하게 내 몸을 움직이는 시간, 하루의 일분일초가 금전으로 환산된다는 것이다.
내가 한 시간을 일하면 9,620원을 받는다.
액수만으로 따지면 당연히 책 한권을 써서 받는 100만원의 계약금이나 백만 혹은 천만 단위의 인세, 판매수익 등 한 번에 손에 쥘 수 있는 수익금의 보상이 더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쩐지 내 노동의 대가를 시간단위로 환산하는 재미가 없다. 또한 일정한 '시간✕기간'의 공식에도 잘 맞지 않다. 인세나 판매수익은 내 노력과 의지에 부합附合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도박과도 같았다.
잘 팔리면 대박, 안 팔리면 쪽박.
나는 그런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문재文才가 뛰어나서 늘 잘 팔리는 글을 써낼 수만 있다면 그런 걱정과 상관없을 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저 하루하루 따박따박 내가 땀 흘린 만큼 고스란히 치환置換되는 그만큼의 정직한 대가만을 바랄 뿐이다.
헤아려보니 1월2일부터11일까지 열흘동안 확인한 공고중에서 전화를 돌리고 면접을 시도한 곳만 3군데 정도?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첫 번째는 샤워타월을 생산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때수건으로 해서 때를 박박 밀어내는 탕 목욕을 자주 했으나 집집마다 샤워시설이 많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 굳이 대중목욕탕에 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간단히 수시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럴때 필요한 것이 샤워타월이다.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샤워타월은 비누를 칠하면 거품이 일어나서 그것으로 몸을 문지러 닦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우연히 타월생산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면접을 보러 간 그곳은 소규모 사업장이었다.
사무실에도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샤워타월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실제 생산현장은 두개의 파트로 나눌 수 있는데 한쪽은 나일론실로 다양한 색상을 섞어가며 일정한 모양의 샤워타월을 직조, 생산한다. 그렇게 수백 수천 장씩 생산된 샤워타월 더미들은 미싱작업 파트로 전달된다. 미싱은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일반미싱이 아니다. 굉장히 크고 복잡해 보이는 구조를 가진 미싱기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 기계에 샤워타월이 지나가면서 양쪽 끝부분의 시접이 자동으로 접혀 박음질되어 대기중인 작업자 앞에 쏟아진다.
작업자는 그것들을 한장씩 추슬러 모아 정해진 단위로 묶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할 일은 아주 단순하다. 그 와중에 불량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며, 가끔 미싱의 실이 끊어지면 연결해주고 기계가 서지 않도록 관리하는 정도이다.
그런 기계가 대여섯 대...두 사람이 미싱기계 3대를 관리하며 하루종일 돌아간다.
그 방은 나일론 냄새가 가득했다. 겨울이어서 꼭 닫은 실내는 환기도 잘 되지 않는듯했다. 일이 쉬워서 한번 자리잡으면 대부분 오랫동안 일한다고 했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 3월부터인가 이미 야근이 시작되어 미리 성수기 대비 물량을 초과 생산하게된다고 했다.
미싱기계는 누구나 초보라도 배워서 관리할 수 있으며, 내가 할 생각만 있으면 그자리에서 채용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가늠해보았다. 할 수 있을까...다들 한다는데 못할 것은 없어보인다. 문제는 작업장내에 가득한 나일론 냄새였다. 오래 머무르다 보면 냄새는 금세 둔감해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냄새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고해서 그 냄새가 내 호흡기를 통해 들어오지 않는 것도아니지 않은가...나는 잠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면접후 작업장을 보여주던 공장장은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순간적으로 실망한 빛이 얼굴에 스쳤다. 고민후 꼭 전화하겠다고 다짐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고민끝에 전화를 했다. 해보겠다고. 그랬더니, 이번에는 내가 뜻밖이었다. 바로 출근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머뭇거리면 그 밥그릇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무조건, 당장 일할 수 있다고 덤비는 사람만이 금방 나온 따끈따끈한 밥그릇을 차지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는플라스틱 용기제조업체.
플라스틱 사출되어 나온 약병의 뚜껑을 검사해서 잡티나 불량을 잡아내는 것이다.
플라스틱 사출 역시 기본적으로 플라스틱 냄새가 날 것이라는 것은 충분이 예상한 상태이나, 집에서 멀지 않고 소재의 특성상 매우 가볍다는 장점을 생각하여 일단 현장이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소규모 조립식건물 공장의 1층에서는 플라스틱으로 약병의 뚜껑을 찍어내고, 2층으로 올라가니 사무실겸 불량검사실이 있었다. 대체로 영세한 업체였으나 2층은 더욱 열악해보였다. 천장이 낮은 느낌이 드는 그곳은 내 키보다 그리 높지 않을 정도였고 사장이 부재중인 그곳에 사장부인이 대신 나를 맞아 면접을 보았다.
조명등을 하나 더 켜놓은 불량선별데스크에는 외국인노동자로 보이는 젊은여성이 모자와 마스크를 끼고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플라스틱용기의 병뚜껑을 하나씩 꺼내어 들여다보며 불량을 찾고 있었다.
당연히 그 방에도 들어서자마자 플라스틱 냄새가 나를 반겼다.
역시 냄새는 피할 수가 없는 것인가...옆에 환풍기라도 하도 달면 좀 덜할 것같은데, 그런 환기장치는 없었던가...있었어도 별로 효과가 없었던가 싶다.
내또래로 보이는 사장부인은 면접을 하며, 나이를 들먹였다.
하얀 플라스틱에서 티끌을 찾으려면 눈이 좋아야하는데, 일단 나이가 있으니 눈이 나쁠것이라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 눈이 좋을리가 없지 않은가...노안도 있고...
그럼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잘 할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실내에 가득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일단 무겁지 않으니 한번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자가 나에게 뚜껑을 주면서 티끌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의외로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흰바탕에 검은 티인지라 눈에 잘 띄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면접은 끝났고 사장이 돌아오면 상의해서 연락을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왔으나 결국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러자 스스로를 위로했다, 플라스틱 냄새가 마음에 걸렸었기에, 다행이라고 잘됐다고.
그다음으로는 문구제조업체였다.
집에서 5~6분정도 거리로 정말 가까워서 한달음에 가보았는데, 서류철_File을 주로 생산하는 곳이었다. 수백장의 파일첩들이 생산되면 펼쳐진 상태인데 그것을 접는 선대로 재빨리 접어 투명비닐 포장지에 넣고 박스에 정해진 수량만큼 채워넣는 것이다.
면접은 별다른 것 없이 담당자가 현장으로 데려가더니 그 작업을 해보라고 시켰다. 얼덜결에 옆의 작업자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정신없이 몇분동안 작업을 했다.
그러더니 나중에 연락주겠다는 형식적인 말을 남기고 면접은 끝났다.
그동안 많은 면접을 해봤지만 그렇게 무례하고 불친절한 경우도 처음이었던 것같다.
근무조건 제시라든가 실제 면접은 하지도않고 갑자기 시험하듯 일을 시켜놓고 얼마동안 해야하는지 말도 없이 사라져서, 정작 일하는 것을 보겠다는 의도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더니 한참후에 나타나서는 해보니까 어떠냐느니, 할 수 있겠냐느니 하는 식의 형식적인 멘트도 없이 그럼 이제 가보라며, 현장으로 데려올 때는 앞문 쪽으로 들어왔다면 나갈때는 저쪽 뒷문쪽으로 나가라는 식으로 길을 일러주며 생전처음 가본 남의 건물에서 낯설고 복잡한 문들을 혼자서 이리저리 찾아가도록 한 것이었다.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아서 나보다 나이 들어보이는 여성들도 많았다. 한번 시작하면 오래다니는 곳인 듯했다. 그점에서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취업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결과적으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한가지 의아한 점은, 근무시간이었는데, 오전 8시30분에 시작하면 5시30분에 끝나는게 맞다.
그런데 그곳은 오후6시에 끝난다고 되어 있었다. 하루 근무가 8시간 30분이 되는 것이다. 그 점이 궁금해서 헤어지기 전 그거 하나를 물었다. (혹시 매일 30분을 연장근무로쳐서 일당을 추가해주는 배려심인가싶어서...) 그랬더니, 중간에 휴식시간이 있지 않느냐, 그것을 감안해서 30분더 일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럼 다른 회사들은 중간에 안 쉬어서 하루 8시간 근무를 하나? 다들 1시간 점심시간과 오전/오후 최소 10분씩의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그럼에도 근무시간은 8시간이다.
그런데 이들은, 중간에 니들이 쉬느라 잡아먹는 시간이 있으니 그만큼 더 일하고 가라는 셈인 것이다!
셈이 바르다고 해야하는지 영악하다고 해야하는지 그럼에도 그곳에서 수년씩 묵묵히 일하는 이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참고로 샤워타월업체도 위와 같은 8시간 30분 근무조건이었는데, 매일 30분을 추가연장근무로 계산하여 30분만큼 1.5배로 수당계산을 더해준다고 했다. 그것은 서로에게 도움이되는 조건이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