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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Feb 19. 2023

말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_거짓과 침묵의 경계

원래 오후6시가 퇴근시간이지만 S제과는 일이 일찍 끝나면 퇴근을 일찍 시켜주는 뜻밖의 배려(?)심이 있었다. 휴게실이 없는 대신 그런 식으로 보상을 하는 것인가 싶었다. 그래서 근무 마지막날인 그날도 1시간이나 일찍 퇴근이 가능했다.

다만 그렇게 1시간이나 일찍 종료하기 전에는 저 덩치 큰 제빵랙 수십 대의 모든 칸칸에 채워져 있던 묵직한 제빵트레이(첼제 쟁반)를 빡빡 문질러 닦는 일을 해야만 했다.

일주일간 그곳에서의 일은 뭐하나 힘들 것이 없었으나 탈출 직전, 어쩔 수 없는 반장의 지시에 따라 트레이 설거지에 투입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그 일은 최악이었다.

철제 쟁반 하나하나의 무게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그것을 수십 장씩 전부 빼내어 세제 푼 물에 담가 씻고 헹구고 잠시 물을 뺀 다음 다시 끼우는 노동의 강도는 엄청났다.

허리가 끊어지고 양쪽 팔뚝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젊은 베트남여인과 함께 설거지를 했으나, 씩씩대며, 헉헉거리며, 나중에는 xx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속으로 그래, 잘 그만두는 거다...어쩌다 한번씩이라지만 이렇게 끔찍한 일은 형벌이나 마찬가지다며 홀가분하게 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에너지를 다 빼앗기고 탈출한 뒤, 운전석에 앉아 부재중 통화와 남겨진 메시지를 발견했다.

[Web발신]
안녕하세요
ㅇㅅㅂ병원 호흡기내과입니다
12/5일 진행한 객담검사 결과가 일부 나와 연락드렸으나 통화가 되지 않아 문자 남깁니다.
주말에는 저희가 근무하지 않아 월요일 9시 이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스크 착용해 주시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나 가족외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자제해 주세요 직장에 출근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되니 일단 토, 일, 월은 쉴 수 있도록 해주시고 자세한 것은 월요일에 다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방비상태에서 확인하게된 문자는 막연한 근심을 현실로 확정해주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 기가막혔다고나 할까...

아, 월욜부터 출근해야 하는데...(대형베이커리 공장이 떠올랐다.)

곧바로 전화통화를 했고 시각은, 12월 23일 오후5시3분 정도..?

20여일전 객담배양검사를 의뢰하고 잊고 있었던 '대학병원의 결핵상담실'이었다.

통화내용도 다르지 않았다. 주말이라 당장 병원에 달려갈 수도 없으니 월요일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는 수밖에.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이 멍해졌다. 다음주부터 출근하기로 한 데는 어쩌란 말인가.

일단 활동성결핵으로 판명되면 최소 2주동안은 외출을 자제해야한다. 감염력이 있다고 보기 때 직장에 다닌다면 앞으로 2주 동안은 출근도 하면 안된다,는 결핵간호사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지금 다니는 곳은 오늘이 마지막이었고 월요일부터는 다른 곳에 출근하기로 돼있는데, 결국 그만두라는 얘기네요?

내가 허탈하게 반문하자 수화기너머의 결핵간호사는 애써 자상하게 말했다.

아니요, 굳이 그만둘 필요는 없어요. 그냥 2주정도만 지나면 감염력이 없으니까 그때부터는 근무하셔도 상관없으니 그렇게 말씀하심돼요.

그녀는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가 싶어 실망스러워하는 나를 이렇게 위로했다.

그러니까, 그 회사에는 굳이 내가 결핵확진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냥 몸이 안 좋으니 2주정도만 더 쉬고 출근하는것으로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조언이 고마웠다.


통화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결핵확진 사실을 이야기하자, 남편은 코웃음을 치며 뜻밖에도 대수롭지않게 여기는 것이아닌가! 농담처럼 받아들이며.

아, 괜찮아! 나도 옛날에  동네병원에서 결핵이라며 며칠동안 약 먹다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서 큰 병원가서 다시 검사하니까 오진이었어! 그러니까 당신도 아닐 거야, 결과가 잘못 나온걸테니까 신경 쓰지마! 결핵은 무슨... 그럴리가 없어...아닐 거야...하하하..

하늘이 무너질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나 하찮게, 자신의 오진 경험에 비추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는 듯한 태도가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남편말대로라면, 그냥 오늘의 통보를 무시하라는 뜻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 반응에 나는 오히려 서운하고 화가 났다.

지금 대학병원에서 객담배양검사를 해서 결과가 나온건데, 어떻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오진일 거라고 말을 하나? 그 누구보다도 결핵이 아니길 바라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야. 결핵이 아니면 정말 좋겠지만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약 잘 먹고 얼른 잘 낫도록 하자고 말을 하지는 못할 망정, 어쩜 그렇게 코웃음을 치냐?

실은 남편도 황당해서 나온 반응이었으리라...

그로부터 주말내내, 남편과 나와 어머니는 모두 황당하고 싱숭생숭한 심정으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주말이라 어디 가서 약을 사다 먹을 수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나는 대형베이커리공장의 출근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고민끝에 친절한 면접관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앞서 결핵간호사가 얘기했듯이 몸이 안좋아 그러니 출근을 2주 정도만 미루어도 되겠는지, 가능하면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갰으나 만약 안 된다면 취업을 포기하도록 하겠다고.

담당자님 안녕하세요
...(생략)
얼마전부터 감기가 심해서 기침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가서 검사를 했더니 호흡기에 문제가 좀 생겼으니
2주 정도는 약먹고 쉬는게좋겠다며 출근도 자제하라는 소견을 오늘 오후에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저도 당황스럽지만 저를 많이 배려해주신 담당자님께 너무나 죄송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제 욕심만 먼저 말씀드리자면, 약 2주후인 1/10일부터는 정상적으로 출근해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더 그렇게 배려해주실수 있을지 진심으로 여쭙습니다.
만약 더이상의 봐주기는 안된다고 해도 어쩔수없겠지만, 한번만 더 양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두번째기회도 주셨는데 건강상의이유로 또다시 이런 글을 드리기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중략)
어떤 답변이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이만.


취업되었던 곳에 너무 멀다는 이유로 포기했다가, S제과에 실망하여, 다시 채용해달라고 두드려서 얻은 두번째 기회인데 다시 포기해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기도 하고 면접관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다음날인 요일까지도 나는 계속 그 문제에 대해 복기했다.

간호사의 말대로 결핵얘기는 쏙빼고 2주 뒤에 출근하여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떼고 근무하는게 맞을까, 모든 사실을 실토하고 포기를 해야 할까...

나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다.

나의 이익을 위해 본의아닌 거짓말을 하게 되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도덕적이고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인간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깊은 고민끝에,  결국 장문의 문자 한통을 다시 날렸다.


담당자님 부득이 다시 글을  드리게되어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제 병원관계자의 조언에따라 '2주동안 쉬고 그후부터는 출근할수있으니
출근시점을 다시 2주 미뤄주실수 있을까 여쭈었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그냥 포기하는게 담당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는것같네요.
어제 제가 통보받은 호흡기관련 발병증상은 얼마전 기침때문에 <객담검사_배양검사>를 실시한결과
결핵균이 나왔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서 회사에 어떻게 말해야하느냐고 물으니,
어제 쓴 내용대로 '전염성은 2주후에는 사라지니까 2주후부터는 출근해도 된다,
약만 그후로 6개월간 꾸준히 제대로 먹으면 낫는다'고 하면서
굳이 결핵균이 나왔다소리는 하지않아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OO베이커리에서 일하고 싶은 욕심으로, 어제는 담당자님께 위와같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제마음이 개운치않아....(중략)...솔직하게 지금 다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전화해서 다시 출근하면 안되겠냐고 했을만큼 저는 OO베이커리에서 일하고싶지만 이번 돌발상황으로 담당자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판단을 했습니다
....
그동안 배려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후략)

인연이 아닌것은 끝내 아닌가보다, 고 나는 위안을 삼기로 했다.

내가 가고 싶어도 결코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반면, 간절히 바라지 않아도 수월하게 채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이번엔 정말 아닌가보다.

그 면접관과는 딱 한번 면접을 본 것밖에 없지만, 이토록 나혼자 지지고 볶아대며 민폐를 끼친 것도 사실이니 이제 그만 미련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핵 감염사실을 자백하는 글을 보내고 나자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고 나는 병원에 가서 결핵확진 결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듣고 향후 6개월간 약을 먹게 될 것이고, 규칙적인 약복용만 지키면 완치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불어 함께 사는 가족들도 당장 보건소에 가서 결핵검사를 받게되었고 남편과 어머니 모두 감염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후, 지난 6개월간 근무했던 비타민회사와 1주일만에 끝낸 S제과의 동료들도 의무적으로 결핵검사를 받게되었다. 그 점에서 나는 그 모든 이들에게 몹시 미안했다. 혹여 감염자라도 나온다면,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옮긴 것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의 결핵감염진단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결핵환자가 의외로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잠복결핵이라고 하여, 자신이 걸렸는지도 모른채 생활하는 경우도 많고 치료제를 복용하다가도 부작용때문에 치료를 중단하여 결과적으로 치료가 어려워지고 치료기간도 더 길어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결핵은 과거 잘 먹지 못해서 영양상태가 좋지 못하던 시절에 흔하던 질병이었고 국민소득이 올라가 잘먹고 잘 살게 되면서 거의  없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혹은 최근들어 집단생활을 하는 곳에서 더러 빈발하기도 하는 듯하다.


그로부터 첫2주는 결핵환자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기간이었다. 갑자기 매일 먹게 된 10여알 정도의 결핵약이 낯설고 당혹스러웠으나 꾸준히 성실하게 먹기만 하면 6개월이면 완치가 된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또한 어떤 부작용도 느끼지 않고 약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2022년과 2023년이 교차하는 시점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다 결국 결핵이라는 턱에 걸려 넘어졌던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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