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도무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어둠속에서 카톡메시지를 작성했다. 그러나 차마 그 시각에 그것을 보내지는 못했다.
날이 밝은 다음, 그래도 이것을 보내야할지 다시 한번 돌이켜본 다음 전송했다.
나는 상처받았고, 이렇게 단호하게 하지 않으면 이후로도 나를 귀찮게 할 것 같아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혀야만 했다.
어제는 어찌됐든 지나간 시간이고, 우리는 이제 더이상 만나지 않는게 좋겠다. 귀찮은건 딱 질색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ㅇㅈㅂ까지 아까운 시간과 기름 써가며 따라가는 내 모습을 보고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당혹스러웠으나 네 얼굴을 봐서 참았다. 어디서 터무니없는 사이비종교에 사람을 끌어들일 꼼수를 부리니.
실망이다. 난 너의 친절과 다정함에 고마움을 느껴 기꺼이 전시회 가자는 제안도 부담을 감수하고도 받아들인건데..뒤통수를 제대로 쳤어! 덕분에 다시금 사람에대한 불신감을 되새기고, 주위에 인간에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이들이 얼마든지 가까이 있을수있음을 깨닫게 해주어 감사하다. 더 긴얘기는 줄이겠지만, 난 그렇게 남의 말 듣고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아니고 더군다나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잡스런 사이비종교에 현혹될만큼 찌질이도 아니다. 그곳에 데려가고 강제로 홍보영상을 보게만들고 나중까지도 참 절박해보일만큼 목사가계속 떠들어댄 이유는 결국 전도하겠다는 의지때문인거겠지.
인터넷 잠깐 검색하면 다 나오는걸 눈가리고 아웅도 아니고 나를 포섭대상으로 삼다니 그렇게 내가 만만해보였니. 전에도 어떤 미친년이 JMS_그 사이비 종교에 포섭하려고 헛소리를 해대는것을 경험하기도했는데
'그딴소리 하려면 다시는 만나지말자'니까 종적을 감추더구나.
살수록 세상곳곳이 지뢰밭이로구나. 어제 점심은잘먹었다. 심한말은 하지않으려 했으나 분명히 말한다.
정신차려라.
넌 좋은 사람인데 네가믿는그게 사이비라는건 알고나 있는건지 안타깝다. 다음부터 누굴 포섭하려거든 미리 신중하고 조심스럽게물어보길 바란다.
니가 믿는 사이비종교에 대해 얘기해줘도 되겠느냐고.
사실 네가 뭘 믿든지 상관없지. 지나가는 돼지새끼를 믿든지말든지. 그러나 조금 안타깝구나.
우리인연은 여기까지로 하자. 인간에 대한 실망이 크다.. 남편이 늘 말했지 아무도 믿지말라고! 그말이 진리임을 이번에 확인하네. 아무도 이유없이 친절할 리는 없다는 사실을.
잘 지내! 카톡은 차단할게. 매너있게 대하는 것도 여기까지만.
네가 나에게 준 배신감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될것같아서 좀길게 썼다.
5월1일 근로자의 날, 아침엔 조금 흐린가 싶더니 이내 맑아진 하늘은 눈부신 태양과 적당한 바람으로 반짝거렸다. 근로자들에겐 꿀같은 연휴의 마지막이기도 한 오월의 첫 휴일.
나는 K와 함께 어느 전시회에 다녀왔다.
나보다는 대여섯살이나 젊은, 오십 대 초반의 그녀 K는 바로 얼마전 도망치듯 벗어난 패배의 기억만이 가득한 그 직장에서, 온몸을 침범해 오는 고통에 맞서 힘겨운 사투를 벌일 때 함께 일했던 팀원이며 나에게는 몇년이나 선배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를 대하는 온도는 다른 동료들보다는 조금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퇴사 몇 주 전에는 2인1조 한 팀이 되면서 조금더 가까워졌고 말 한마디에도 나를 생각해주는 느낌에 나는 순수하게 감사하고 기뻤다.
보답할 건 없고 해서, 남편의 번역작품들 중에서 어떤 유명 외국작가의 소설책을 선물했다.
내가 힘들어 할 때 사소한 한마디라도 힘을 주는 그녀가 고마워서.
책을 받은 그녀는 자기는 책을 많이 읽는다며 무척 기뻐했다. 나도 보람을 느꼈다.
나는 가끔 남편의 훌륭한 작업물에 대한 자발적/적극적인 홍보대사를 자처한다. 집에 가장 흔하고 널린게 책이다 보니, 종종 좋은 사람을 만나면 주로 그의 책을 선물한다.
그로써 그의 훌륭한 작업성과물들을 널리 알리고 한사람의 팬이 추가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무튼. 그뒤 K는 나의 책선물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시간이 되면 어느 뜻깊은 전시회에 함께 가보자고 제안해왔다.
언니, 이 전시회가 십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가본 사람들이 참 좋다고 하네요. 우리도 한 번 가볼까요, 언니 남편, 작가님도 꼭 함께 가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제가 표를 구할게요! 어느 교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이긴 하지만 상관없잖아요?
아 그래요? 네, 갈게요! 장소야 상관없지요...
나는 남다르게 조금은 다정하고 친절한 그녀 K에 대해 남편에게도 이야기하고 함께 전시회에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도 그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조금 바쁜 일정 지나고 오월 중순 쯤으로.
그러나, 내가 4월말을 넘기지 못하고 퇴사하면서 전시회관람 일정은 변경되었고 다가오는 근로자의 날_5월1일로 당겨졌다. 그러다 보니 이즈음 날마다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남편은 부득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날, K와 나 둘이서만 집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달려갔다.
나는 그녀의 친절과 배려심에 대한 보답으로, 솔직히는 그리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내 차로 그녀와 동행하였던 것이다.
목적지는 처음 가보는 장소이다보니 나들목을 헷갈리기도 했으나, 다행히 그리 오래 지체하지 않고 도착했다. 전시장인 ㅎㄴㄴㅇ교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섰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나는 좀 당황했다. 귀한 손님을 대하듯, 관계자들이 입구에 늘어서서 환대하는 분위기 아닌가.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그녀가 자수하듯 말했다.
언니, 제가 미리 얘기했어요...언니가 작가님이시라고...
그녀와 조금 가까워지고 그녀의 친절에 화답하듯 남편의 책을 선물한 뒤, 퇴사하는 날에는 예전에 내가 썼던 청소년대상 도서를 선물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라고 들었기에, 그 책은 청소년을 위한 저작물이기 때문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로써 나의 이력도 그녀에게는 자연스럽게 밝히게 되었다...
그런데, 전시장에 들어설 때의 뜻밖에도 매우 부담스러운 환대와 그녀의 태도에 나는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다.
문 앞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과 그녀는 이미 아는 사이였을 뿐더러...나와 함께 그곳에 가기로 한데는 모종의 모의가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했다. 이제와서, 여기까지 와서 황망하게 돌아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서 전시장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역시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두어 명의 신사와 K의 지인인 듯한 여인이 우리를 그곳의 어느 밀실로 안내했다.
밀실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한 심정으로 강제로 그방으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테이블 위에는 이미 네 사람 분량의 다과세트가 놓여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티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전시회는 지금 관람중인 사람들이 있는데,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면 차분하게 관람이 어려울 수 있으니 잠시 이곳에서 다과와 담소를 나누며 시간차를 두는 것도 좋을 것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미 그곳에 많은 이들이 관람 중이고, 한번에 관람가능한 적정 인원수를 나름대로 정해두었다면, 진지한 관람자들을 배려하자는 취지라면.
자리에 앉자, 두 신사의 정체가 밝혀졌다.
한 사람은 그 전시장이 있는 교회의 목사라던가 인근에 있는 같은 이름의(체인점 느낌..)교 회목사라던가, 또 한 사람 역시 놀랍게도 우리 동네에 있다는 그 교회의 목사!
조금씩 어떤 의도가 더욱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번갈아가면서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나의 지나간 이력, 작가라는 명분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나는, 굳이 그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으나 간략하게 나의 글쓰기작업의 의의 등에 대해 설명했다. 느닷없이 주어진 밀실에서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무작정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고 변명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