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다시 펼치며
진짜 좋은 책은
두 번, 세 번 읽어도 새로운 해석을 줄 수 있는 책이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한 문장이 돌부리처럼 솟아올라
그 자리에 나를 걸려 넘어뜨렸다.
그 순간, 오래된 시간이 열리듯
내 안에서 잊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줄 몰랐던 거야!
꽃의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했어.
서툰 거짓말 뒤에 숨은 부드러움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하지만 난 너무 어려서 꽃을 사랑할 줄 몰랐던 거야.”
— 쌩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
그 문장은 내 심장을 정면으로 부딪혀왔고,
사랑을 몰랐던 시절의 내가
문장 속에서 다시 일어섰다.
그때 나는 타인의 서툰 거짓말의 입만 보고
그 뒤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말의 표면만 믿고,
그 속에 숨은 떨림과 진심은 읽지 못했다.
그 깨달음이 내 안으로 떨어졌다.
소리 없이, 그러나 번개처럼.
무릎이 깨져 피가 맺혔다.
그 피는 차갑지 않았다 —
오히려 오래된 감정의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뜨겁게 흘러나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글이란,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넘어지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넘어짐 속에서 나는 다시 쓰이고 있었다.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매번 다른 눈으로 그 앞에 선다.
글은 스쳐가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글에 걸려 넘어지게도 한다.
넘어짐은 상처를 남기지만,
그 안에서 들려오는 숨이 있다.
그 고요한 숨결이 나를 조금씩 바꿔 놓는다.
지금, 나는 다시 글에 걸려 깨어난다.
넘어짐의 자리에서 상처가 숨을 고르고,
발화된 빛이 나를 다시 일으킨다.
그때 깨달았다.
넘어짐은 상처가 아니라,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빛의 틈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