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체온에서 다시 태어나는 작품
미셸 투르니에 『흡혈귀의 비상』 중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 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마침내 독서가 끝나면, 소진되어 독자에게서 버림받는 그 책은 제 상상력을 수태시키려 다른 생명을 기다릴 것이며, 그 소명을 실현할 기회를 만나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나들 것이다.”
작품은 타인의 체온에서 다시 태어난다
어둠도 빛도 아닌 시간,
책상 위에 남겨둔 문장은
가느다란 숨을 품은 채 떨리고 있다.
손끝에서 미세하게 뜨거웠던 잉크의 체온은
점점 식어가며
창밖의 바람을 향해 귀를 기울인다.
작품은 그 찰나에
문이 없는 문턱 위에 선다.
남지 못하면서도
완전히 떠나지 않은 자리,
바로 그 틈에서
보이지 않는 작은 새들이
일제히 날개를 켜는 소리가 들려온다.
종이에 남겨진 글자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의미의 그림자는
이미 공기 속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독자에게 닿는 순간은
눈으로 보이지 않고 귀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마음은
예고 없이 덮치듯
문장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때 작품은 체온을 얻고,
고요에 잠긴 글이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말해지지 않은 여백에서 꿈이 피어나고,
어떤 문장은 그 사람만의 표정과 얼굴을 갖는다.
그 변화가 일어나는 자리에서는
작가의 표정도, 의도도, 기원도
고요히 흩어진다.
남는 것은
독자 속에서 태어나는 또 하나의 파동뿐이다.
언어는 은밀히 일러준다.
완성이란 갇힘이 아니라 떠남을 허락하는 일이라고.
떠난 작품은
낯선 기억과 감정 위에서 다시 숨을 틔우고,
고요한 방을 탈출한 말들은
다른 심장 위에 내려앉아
잠시 머물다 또 다른 문장을 짓는다.
투르니에가 말한 ‘흡혈조’는
잔혹한 이름을 걸치고 있지만,
실은 타인의 꿈을 통해
다시 태어날 생명에 더 가깝다.
소진은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온도를 얻기 위한 대기,
버림은 끝이 아니라
다음 비상을 위한 응축이다.
그래서 오늘도
말의 끝을 잠그지 않고
서랍을 조금 비워 둔다.
닫힘이 아니라 깨어 있으려는 숨이기에,
새벽의 결이 드나들
여린 틈 하나를 남겨 둔다.
어떤 이의 체온 속에서
작품이 다시 잉태되는 찰나를 그리며,
나는 또 한 줄을 그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