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멈춘 자리에서
결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걷기 예찬』 중
바슐라르는 말한다.
'우리들의 영혼은 침묵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하여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다무는 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침묵은 어떤 장소의 서명인 양 메아리치는 울림이다.
침묵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리의 사라짐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자질,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의 가벼운 맥박이다.
귀에 들리는 침묵의 밤! 나는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침묵은 계절을 탄다.
일월의 눈에 덮인 들판 속의 침묵이 다르고
팔월의 뜨거운 햇빛에 겨워 꽃과 잎이 폭발하고
벌레들이 울어대는 한여름의 침묵이 또한 다르다.
같은 풍경 속에서도 침묵은 날마다 제각기 다른 결을 보인다.
고요 속에 서걱이는 시간의 결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감각—
그 감각의 잔향이
침묵의 결을 서서히 빚어낸다.
입을 다문 한 점,
어둠이 살아 있다.
그 가장자리에서
미세한 결들이 번져 나와
숨의 결을 세우고,
시간을 붙잡는다.
소리보다 먼저 태어나는 감각,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침묵은 계절에 따라
결을 새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서걱이며 깊어지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