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기서 고기라지만
올해 2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약속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해 근처 서점에서 책을 좀 구경하다 <아무튼, 비건>을 집어들었던 것이.
지난해 모 주간지에서 몇 주간 '음식물쓰레기-사료-축산환경'을 다룬 르포를 꽤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나서 일단 책을 계산하고 나왔다. 그리고 남자친구를 만나 그 날 저녁 삼겹살을 먹었다. 올해 마지막으로 먹었던 그 돼지고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맛있었다. 음, 맛있었던 것 같다.
올해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면 역시 그 날 이후 고기가 올라간 식탁과 멀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녁을 맛있게 잘 먹고 돌아와서는 가방에 있던 책을 꺼내 읽다 덜컥,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수단 그 자체로 태어나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느끼다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한때는 영혼을 가졌던 존재를 먹는 일'이 과연 내 몸에 좋은 에너지/기운을 채워줄 수 있을까 하는 다소 미신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물론 영양소 측면에서 적절한 동물성 단백질 섭취의 중요성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사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유 모를 거부감에 소고기를 먹지 않았던터라(새로 알게되는 사람들마다 이유를 물어보시니 정말 마땅한 이유랄게 없어서 "아 제가 힌두교 모태신앙이라.. 호호 놀라시긴, 농담이에요."하고 눙치는 일에는 이제 이골이 났습니다.) 어쩌다 시작된 이 채식생활도 그저 소고기 편식의 연장선 정도로 생각했었다. 특히 책에서 읽은 동물권,환경보호,건강 등 채식의 주된 이유들이 내게는 어쩐지 소명의식처럼 느껴져서 자신이 없기도 했고.
"친구들, 나 요즘 고기가 좀 안 내키네. 오늘 메뉴는 회 아니면 파스타 어때?"
그렇게 점심 약속은 '파스타-칼국수-텐동'이, 저녁 약속은 어류 아니면 갑각류의 루틴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가 길어진 덕분에(?) 집밥을 먹을 일이 많아지니 점점 다양한 (고기 없는)메뉴를 만들기에 이르렀고..
고기가 먹고싶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지만(한번도 안 들었던 건 아니다.)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다시 먹겠다고, 그렇게 10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은 주변 사람들을 점점 불편하게 만드는 것 때문에 좀 고민스러운 상황이다. 특히 올해 두 명의 남자친구를 만나(고 떠나보내)는동안 가까운 사이에서의 식성/식단 이슈는 결코 가벼이 볼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는데 이 얘길 하자면 일단 냉장고에서 맥주를 좀 꺼내와야할 것 같으니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아, 그래서 이 변화가 마음에 드냐하면 앞서 말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 빼면 꼭 마음에 든다고 하겠다. 소화불량이 사라졌고, 지금까지는 내 손으로 사본 적 없던 채소,해산물 등에서 미식의 즐거움이 +100쯤 된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