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 보다는 나은 선택인 것 같아서.
결국 사직서를 냈다.
이 흔하디 흔한, 나와는 관계가 없을 줄 알았던 문구를 내가 적는다.
사직서를 내는 마음은 이러했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사직서를 받은 사람은 힘든 시기에 회사를 그만둔다고 욕하지만, 내가 그만두기를 바랬던 것 아닌가?
아니면 계속, 괴롭게 다니기를 바랬던 것일까.
나, 나를 구하기 위해 사직서를 냈다.
문제는 내가 마흔 두 살이라는 것.
그리고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다는 것.
내가 굳이 말하고 다니지 않아도 내가 그만둔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마흔 두 살에, 10년이나 다닌 회사를 그만두는 나를 보며, 다들 무슨 계획이 있는 건지 어디로 이직하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감은 두 눈 처럼 깜깜한 내 속내는 모르고.
사람들에게는 서울을 떠나고 싶다고 둘러댔다.
지긋지긋한 인간군상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나, 인간군상을 '서울'이라는 단어로 대체해서 말했다. 니들이 싫고 소름돋아서 그만둔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미안, 서울. 서울은 죄가 없다.
조목 조목 따지고 들어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할 최소한의 애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대상과 더 이상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은 것이, 정확한 표현일테다.
상처 받았지만, 반격하고 싶지는 않다.
반격하고 싶지 않은 것은 살면서 체득한 삶의 지혜이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친구와 싸웠다.
누가 더 옳네 마네 말씨름을 하다가 친구가 내게 "넌 악마야!"라고 말했다. 충격. 그래서 나도 되돌려주었다. "내가 악마면 넌 최고악마야."
친구가 울었다.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도 친구가 울었다. 선생님이 친구에게 왜 우냐고 하자, 친구가 말했다. "쟤가 저한테 악마라고 했어요."
난 그 친구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싸운 계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친구가 울었다는 이유로 내가 사과를 해야 했던 그 상황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런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람들은 어차피 진실에 관심이 없다. 내가 그 아이를 울렸다는 것만 중요한 사실처럼 뻗어나갈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누가 잘못하기를 바라고만 있는 사람들에게 꽤 재미난 소재를 던져 준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분명한 퇴사 사유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것은 뜨거운 감자.
오직 나만을 태운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자기 자리를 찾아 일상을 보내겠지.
인간관계는 이해관계.
어릴 때도 어른이 되어서도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수의 이해와 늘 같은 뜻이 아니고 마는 것은 어딘가 생기다만 듯한 내 탓이니, 모든 상황은 사실 자초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다가 문득 소름이 돋았다.
나 지금, 나는 피해자이고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
구역질 나는 자기방어를 내가 하고 있다니. 소름 돋는다.
사실 회사를 다니며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내 자신이었다.
이것 밖에는 안되는 내가 용납이 되지 않아서 매일 매일 마음이 앙상해졌다.
한 걸음 떨어져서 상황을 보라는 말,
또라이 총량의 법칙이 있어서 모든 회사에는 꼭 저런 사람이 한 둘씩 있다는 말,
나도 알고 있는 그런 말들이 내 상황이 되니 전혀 응용이 되질 않았다.
나를 평가하는 권리가 있는 사람의 괴롭힘.
그 괴롭힘으로부터 나를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일을 그만두는 것.
마음이 죽기 전에,
그 사람의 평가가 나의 평가가 되기 전에,
그 사람의 권리를 거두기 위해, 사직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