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과정. 2

조용한 화해

by 썸썸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아름다웠고, 현명해 보였으며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완벽해 보였던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져 곧 체념을 하게 되었다. 지난여름, 나는 고민 끝에 5년간 사용했던 정든 사무실을 정리하면서 그나마 조금은 남아있던 자존감마저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한참 사업이 잘 될 때의 자신만만했던 나의 태도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난 마음속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그려놓고 있었다. 한편으론 우습게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의 초라함이 들키진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날에 나는 평소보다 나를 더 밝게 포장을 했다.






늦은 밤, 난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사실 꿈속 분위기는 악몽이라 하기엔 생각보다 평온했다. 현실에서 분명 거리감을 느꼈던 그녀지만 꿈속에선 나는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더없이 즐거워하고 있는 있는 게 아닌가.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지려고 꽤나 열심히인 나를 발견했다. 그건 분명 악몽에 가까웠다.




다행히 곁에 잠든 아이의 뒤척임에 나는 서둘러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혼란스럽고 불쾌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토록 모든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은 정말 이지 오랜만이었다. 왜 이런 꿈을 꾼 걸까. 채 다 묻기도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에 대한 비교와 질투.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선망의 대상이 내 무의식 속에서 꿈으로 투영된 것이다. 내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고,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을 했다.



평소 사치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다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며 살아왔지만, 막상 눈앞에서 허세만 가득한 사람이 아닌, 실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여유를 가진 사람을 마주하자 마음속 깊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동요된 감정은 생각보다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두 시였다. 도무지 이대로는 다시 잠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거실로 나와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애써 떨쳐내려고 책을 펼쳤지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휴대폰 메모장을 켜고 복잡한 감정들을 무작정 글로 써 내려갔다. 엉켜버린 생각들을 남김없이 모두 적다 보면 괜찮아질까. 나는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록을 하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과 직접 글로 남겼을 때의 차이점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았다.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저 외면하고만 싶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글로 토해내는 과정을 거치자 비로소 나는 불편했던 까닭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멈춰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나의 감정들을 눈으로 한번 더 확인을 하면서 마음은 아팠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이미 누군가로부터 충분히 이해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누군가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때문일까. 요동쳤던 감정들이 이내 잠잠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4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10시 즈음 아이들만 재우고 다시 일어나야지 마음먹었지만 몰려드는 피로감에 나도 모르게 그만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꿈에서 시작되었던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가라앉으니 그제야 얼굴에 지우지 못한 화장이 남아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얼른 씻고 다시 자야겠단 생각에 욕실로 들어갔다. 화장을 지우려 세면대 앞에 서서 클렌징을 하던 중 자연스레 거울 속 나에게 시선이 옮겨갔다. 평상시라면 분명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을 순간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얼마 전 들었던 내면소통의 '배경자아'가 떠올랐고, 지금 나를 제삼자처럼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숨을 크게 내쉬곤 '배경자아'를 인식해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그 순간, 과거에 스스로를 옭아매던 수많은 기준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음이 아팠다.

거울 속의 나를 다시 바라봤다.

상처받은 표정을 하는 내가 서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

'미안해'란 말이 새어 나왔다.

진심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물로 얼굴을 씻어내는데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비누 거품과 뒤섞인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을 쉬는데 목구멍 마저 뜨거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미안해.

널 힘들게 해서..

널 무기력한 존재라고 말하고 미워만 해서...

넌 형편없고 바보 같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정말 미안해...



거울 속 나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나는 나에게

조용한 화해를 건넸다.





나와 잘 지낼 수 있을까?

여전히 알 수 없어 두려웠지만




화해를 건넨 순간,

좀 더 괜찮아질 것 같은 마음이 싹텄다.







이제,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