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언니는 일타 강사는 될 수 없는 사람이야. "
" 아니, 왜? "
" 봐봐, 고등학교 애들이 원하는 게 뭐겠어?
내 말 믿어. 내 말이 정답이야. 나만 믿고 따라오면 무조건 1등급이야!, 이런 확신이야. 그 애들은 지금 불안하니까. 불안에서 자신을 구해줄 확신에 찬 사람이 필요한 거라고. 근데 언니는 그런 말은 못할 사람이니까. "
" 그래, 그걸 원하는 거 아는데, 근데 내가 잘 모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잖아. 100퍼센트 정답 같은 게 어디 있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
동생 말이 맞다.
애들은 불안하고,
확신과 정답을 원하고,
나는 그런 걸 잘 못하고.
그건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진짜 궁금했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내가 맞다고, 내 말만 믿으면 된다고? 그치만 때론 그런 확신과 거기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부럽기도 했다. 애들을 위해 일부러 그런 척 하는 거 말고, 진짜 스스로도 그렇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내적 갈등으로 괴롭진 않을 거 아닌가.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나보다 여섯 살 어린 서른 여 명의 고2 여학생들을 만나고, 첫 주부터 '뭔가, 우리 반만 엉망이고 망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을 때. 나의 최애, 쌍둥이인데도 어쩜 이렇게 안닮았나 싶은, 사랑하는 동생이 알려준 팁은 이랬다.
애들한테 쓸데없이(?) 웃어주지 말 것,
길게 이야기하지 말 것,
할 말은 메모지에 적어서 전달만 하고 나올 것.
지금 생각하니 '세상에, 뭐 이딴 걸 조언이라고!! 어이 없다! ' 싶지만, 그땐 우리 반만 야간자율학습 인원수가 적고(거의 옆반의 절반..), 자꾸 보충수업 안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아프대서 조퇴시켜주면 데이트 하다 걸려서 오고ㅠㅠ
선배 교사들의 눈치가 보여 교무실에 들어가기도 싫었던 터라, 그 말을 듣고 다음날 그렇게 해보려 했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성격이랑 맞아야 하는 거지, 그냥 애들 보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번졌고 또 이 이야기 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 또 망했네. 에잇.. ' 했던 날 밤, 동생이 다시 말했다.
" 응, 언니 안 될 줄 알았어. 이미 첫 날 첫 시간에 게임 끝났어. (애들은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파악했어.) 그러니까 언니는 그냥 언니 스타일대로 해 "
" ㅡㅡ;;; 근데 내가 먼저 설득이 되어야 애들을 설득할 수 있는데 나 스스로가 납득이 안되는 걸. 왜 꼭 이걸 해야 해? 강제할 명분이 어디있어? 애들 얘기 들어보면 그것도 이해가 된단 말이야. "
" 언니는 선생님인데 왜 마음은 애들 마인드야? 쯧쯧.. 그러니까 괴롭지. "
20대 중반, 우리의 대화는 이랬다. 나의 이런 고민은 반 년도 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져 오랜 기간 내적 방황이 심했다. 그냥 행정 공무원이 더 마음 편하겠다며 수험서를 수십권 샀더랬지.. 그러다 세월이 흐르며 쪼끔 나아졌으나.. 그래도 내 마음 속엔 여전히 이런 갈등 같은 게 남아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학부모가 된 동생.
마음 먹으면 못할 게 없다는, 과외 학생을 협박(?) 아닌 협박을 해서라도 점수를 올려놓으며 자신감 뿜뿜! 이었던 동생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언니 같은 사람이 선생님이 된 게 다행이야.
내 친구들이 니네 언니는 경력이 얼만데
아직도 그런 고민하면서 사냐고 해.
근데 언니가
그런 고민하면서 사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쯧쯧..에서 다행이라고 바뀌었으니 진짜 다행인건가.
그치만, 나는 여전히 선생님이 아니었음 싶을 때가 많은데. 가끔은 남들에게 욕먹을 소리란 걸 알면서도 ‘안정성’의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한 댓가가 참 크다고 생각하는데. 또 좋은 얘기 늘어놓을 땐 나도 그렇게 못살면서 싶어서.. 이중적인 인간이 된 것만 같아 애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기 부담스러운데. 오히려 이딴 고민 안하고 하루 하루 즐겁게 생활하는 선생님이 애들한테 더 좋을 거 같은데. 초임 때도 그만두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택한 교육 방식이 잘못되었을까봐, 그래서 애들한테 피해 줄까봐. 또 궁극엔 날 원망할까봐 무서워서였다. 졸업 후에 시간이 지나면, 아니 당장 수능 성적표만 나와도 애들이 “ 그때 샘이 강제로라도 저 공부 좀 더 시키지 그랬어요! “라고 말 할까봐.
그럼 나는 뭐라고 하지..
나?.. 나는 너네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줬잖아..? (근데 그게 정말 애네들한테 더 도움되고 나은 거였나…)
이런 생각으로 괴로워했는데, 졸업 후 몇년 지나 찾아온 첫 제자들이 이런 얘기 안해서 얼마나 다행이다 싶었던지. 그 중에 한 명이 내 이런 얘기에 웃으면서 “ 아니 공부 안한게 우리 탓이지 왜 샘 탓입니까. “ 라고 말해줘서, “ 그리고 고2면 그 정도로 선생님 영향 많이 받지도 않아요. “ 라고 말해줘서, 어쩌면 기분 나쁘게 들릴수도 있는 그 말이 얼마나 해방감을 주었는지. 내가 너네한테 엄청 중요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니, 아.. 다행이야.
그럼 그냥 그 애들 말 믿고 편하게 하던대로 하면 되는 것을,, 나는 왜 그렇게 오랜 기간 괴로워했던가. 그건 내게 두 가지 상충되는 욕구가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기질적으로는 통제 욕구도 없고 애들도 다 자기 생각이 있을테니 자유롭게 키워야 한다고 믿으면서 또 학부모, 관리자, 동료 교사에게 학생들을 관리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 싫은 욕심. 옆반보다 야자 인원이 절반밖에 안되어도 그냥 내게 어떤 강한 확신이 있었으면 괜찮았을텐데.. 애들은 강제할수 없다면서 옆반에 몇명이나 남았는지는 왜 봤던 건지 ㅡㅡㅡ
왜 애들이 자발적으로 남아주길 바랬던 건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나는 모순 덩어리였다. (지금도 그런 내면의 욕구들이 때론 상충되기도 하고 뒤범벅이 되어 늦게 깨닫기도 하고, 그렇다. 이제 남들도 그런 면이 있겠지.. 하고, 너무 자책하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을 뿐.)
그치만 생각하면 역시.. 또 이불킥..
20여 년 전 동생이 내게 알려준 것은 좋은 교사가 되는 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통제해서 내 말을 잘 듣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이었다. 아마 지금도 그 방법은 유효할 지도 모르겠다. 교육이 아니라, 통제의 방법으로서는. 나는 그런 식의 확신이나 통제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때로는 그런 방법이 필요할 때도 있고, 어떤 목표를 가졌느냐에 따라 효과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쪽으로 교육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컸다. 뭐 특별히 민주적이라거나 대단한 교육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런 능력과 거리가 멀다. 꼼꼼하고, 뭐든 잊지 않고, 목표를 설정하면 꼭 해내고야 마는, 하기 싫다는 사람도 끌고 가는,, 그런 사람이 못된다. 덜렁대고, 잘 잊어버리고, 하나에 빠지면 주위 눈치는 모르고, 하다가 더 재밌거나 중요하다 싶은 게 있으면 과감히(?) 접어버리고, 내가 좋다고 생각해도 상대가 하기 싫다고 하면 설득을 시도하긴 하지만 마침내는 그렇구나.. 하고 인정해버리고 마는 사람에 가깝다.
확신.
그래서 나는 강한 확신이 있는 사람을 부러워했는데, 요즘 읽은 책들이 자꾸만 나의 이런 ‘불확실성’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때론 그런 강한 자기 확신이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사람의 경우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일 때의 위험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생각이 특별히 나쁘지 않다 해도, 또 그의 의도가 선하다고 해도 이런 식의 태도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은 선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소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가득 차 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그리고 내 선택이나 행동이 진짜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단순한 나의 자기 만족이나 억눌러놓은 다른 욕구 때문은 아니었는지 고민해보니,, 많은 것들이 후자에 속했다. 내 행동의 대부분은 나 좋자고 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결과적으로 행동이 크게 달라지진 못했지만, ‘상대를 위해서’라는 마음이 아님을 깨달은 건 도움이 되었다. 상대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면 의도와 달리 폭력적이 될 수도 있고, 또 내 좋은 의도에 부응해주지 않는 상대방에게 화가 나거나 실망하기 쉬우니까.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렬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쫓아가며 이어진다. 글쓴이는 남편과 헤어지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자기 인생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롤 모델이 될만 한 인물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학자를 택했다. 평생 수집하고 분류해 온 물고기들이 자연 재해로 다 죽거나 부서져버린 끔찍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살아남은 몇몇 물고기에게 이름표를 붙이던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란 이유로. 룰루 밀러는 어떻게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 그에게서 인생을 살아가는 강인한 자세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 삶의 족적을 따라가면 갈수록
그녀는 무언가 아닌 것을 발견하고 불편한 마음이 든다. 자신이 롤모델로 삼으려 그 평생을 추적해 온 위대한 학자가 특정한 범주, 분류 도식에 빠져 그 범주 바깥의 것들을 무시하고 배제해 온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랬다. 자기 확신이 너무나도 강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물고기를 분류하고 범주화했던 것처럼 인간을 범주화하고 등급을 나누는 우생학에 빠졌다. 그리곤 (자신의 눈에) 위대한 조국의 건설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불임 수술을 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조국 미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가 우생학을 퍼뜨리며 많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주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따라가던 글쓴이는 마침내 단 하나의 강렬한 확신이 아니라, 혼돈과 무지를 받아들이는 길을 택한다. 죽음의 이면에 삶이 있고, 부패의 이면에 성장이 있는 것처럼 내가 정해놓은, 보고 있는 어떤 범주 바깥에, 그 너머에 어쩌면 중요한 또 다른 면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수용한 것이다.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해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애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ㅡ 264쪽
내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니며, 나는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인생을 찾았다.
그동안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인생을.
정해진 범주의 틀을 벗어던지고
그 범주 속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대신
그 바깥에 있던, 더 무한하고 커다란 세계와 가능성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다 끝났다는 걸 알았다,
이 문장을 읽는데
그 순간의 느낌이 너무 확 와 닿았다.
내가 그간 정해놓은 인생의 목표나 그림과 너무 다르지만 그런 의식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언가ㅡ
그런데 그 상태가 정말 기쁘고 좋은 거지.
그런 무력함의 단계,
언젠가 그 근사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