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절라 더크워스, <그릿(GRIT)>
“ 언니, 이 일.. 진짜 나한테 안맞는 거 같아. “
동생은 퇴근 무렵 내게 자주 전화를 건다. 집으로 걸어가는 그 시간이 워킹맘인 동생에게는 비교적 자유롭게 수다를 떨수 있는 시간이다. 동생이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작년부터 우리 대화의 주된 주제는 ‘일’이다. 40대를 넘긴 지금 우리는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에서부터 하고 있는 일의 의미, 장차 전문성 개발과 성취감을 얼마나 안겨줄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눈다. 특히 동생은 가정과 직장 사이에서 어느 정도로 균형을 맞춰야 할지, 자신의 커리어를 어떻게 이어나갈지 고민이 많았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이 일을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가?’라는 아주 오랜, 근원적인 물음이 있다. 동생은 복직하며 새로운 업무를 맡았는데 그 일이 성격과 맞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만은, 앞으로 남은 20년 동안 이 일을 계속한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고민이 많아질 것이다. 더구나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기존에 익숙하던 걸 박차고 나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가 더 어려워지니까.
나도 1년차 때부처 줄곧 교사가 내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 일이 엄청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 해도 그것과는 별개로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어딘가 따로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10년 전 동생이 매달 백만원씩은 줄테니 그만 둬도 된다고 말해준 것과 달리, 나는 “ 그래, 너무 힘들면 그만 둬도 된다 “는 말 대신 한 권의 책을 권하고 말았다.
있잖아, <그릿>이라는 책이 있는데, 한번 읽어볼래?
뭔가를 좋아한다는 거 말이야, 그게 우리가 생각했던 거랑 다를 수도 있어.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시간과 정성을 쏟으면 처음엔 그냥 그랬던 게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애정은 그냥 지속되는 게 아니라 그 애정을 지속시키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거잖아. 근데 그런 노력을 오래 해보지 않고 재미가 없다거나 맞지 않는다고 그만두는 건 아닌지, 한번 잘 생각해봐줘.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미안했다. 내가 방황하던 시기에 동생은 오직 내 감정과 힘든 마음만 생각해주었는데, 그후로 10여년이 지난 나는 현실적인 조언만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동생이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근데 이렇게 얘기해서 미안..” 이라는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하지만 동생이 잠깐의 변덕으로 그런 얘길 한 건 아닐테고, 끝끝내 무슨 결정을 하든 나는 동생 편이 되어줄 것이다. 설령 조금 비합리적인 결정이었대도, (그 전에 좀 더 신중하게 고려하도록 돕겠지만) 그렇게 결정한 이상은 그냥 믿고 지지해줄 것이다.
내가 동생에게 추천해준 책,
그릿(GRIT) ㅡ
이 단어는 끈질기고 집요한 근성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릿이 있는 사람들은 목표로 한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다. 어떤 일에서 성공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릿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릿이 있을까? 내가 그릿을 발휘하는 부분은 어떤 곳일까? 그릿은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라면 후천적으로 길러질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 나는 나 자신이 강한 근성을 지닌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구력보다는 초반 스피드, 추진력이 뛰어난 쪽이랄까.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나는 고1 첫 시험을 치르고 졸업때까지 달성하겠다고 세웠던 모든 계획을 고교 3년간 전부 달성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것에서는 지기 싫어하고, 승부욕이 있다. 그 때를 떠올려보니 내게도 그릿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성인이 된 후 나는 왜 그릿이 사라진 것 같았을까?
# 내 천직은 어디에 있을까
나와 친했던 대학 선배는 교사가 되었다는 내 말에, “ 딱이다!! 너랑 너무 잘 어울려, 천직 같아. “라고 했다. 천직? 글쓴이가 자기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생업, 직업, 천직으로 구분했을 때, 나는 내가 생업을 지나 직업 단계로 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랫동안 내 천직은 따로 있으며, 교직은 생업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명감은 없지만,, 월급받는만큼 열심히 일해야 하는 생업. 그래서 수업 시간에 애들이 자꾸 놀자고 하면 돈받는만큼 일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찔렸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은 누가 뭐라고 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아니. 내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안하고 있는 거 같아서 찔리고 괴롭다고! 그러니까 놀자는 소리 그만 하고 공부하자.
나도 이 일을 천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아무런 고민도 갈등도 없을텐데.. 그리고 내 천직이 어딘가 따로 있을 거라 믿었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배운 것도 진짜 좋아하는 일이 어딘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다는 걸, 꽤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달았다.)
“ 많은 사람들이 천직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천직이라는 마법 같은 실체가 존재하고 이를 찾으면 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불안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
나는 사람들이 관심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오해를 한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발전, 심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 천직은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완성품이 아닙니다. “ 그녀는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관리인이든 최고 경영자든 끊임없이 자신이 하는 일이 타인이나 전체 사회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 ㅡ 208쪽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천직을 찾는 사람이 어딘가 있을 이상형을 찾아다니는 사람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딘가에 완벽한 누군가, 또 딱 맞는 어떤 일이 있는 게 아니라 관심과 애정도 계속 물을 주며 키워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 <어린 왕자>의 비밀처럼 서로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난 좀 늦게 깨달았다. 마흔 살이 되던 해 봄, 나는 (행정적인 일 말고) 가르치는 일이 나와 잘 맞는다는 것과 내가 내 생각보다 아이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공부한 것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익선동의 한 카페에서 그런 결심을 했던 순간이 생생하다. 그 전까지 나는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만도 버거워 사회에 도움이 되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았으니까.
내 천직은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 지금 하는 일에 더 관심이 생기도록 만드는 노력
사랑도 시들고 연애에도 권태기가 오는 것처럼, 대부분의 것은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설렘과 흥분, 관심이 사그라들게 마련이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지루함을 안겨주고, 익숙한 것의 가치를 잊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처음만큼 의식하지 못할 뿐. 그러므로 여기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릿>의 글쓴이는 흥미나 관심을 계속 자극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태기를 극복하려 함께 뭔가를 배우고 이벤트를 준비하는 연인들의 노력들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 노력이 상대든, 일이든 그만큼의 정성을 쏟아부어 다시 의식적인 관심을 느낄수 있게 만들만큼 애정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마지막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몇 년째 하고 있지만 아직은 열정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관심을 어떻게 심화시킬 수 있을지 살펴보라. 당신의 뇌는 새로움을 갈구하기 때문에 다른 일로 옮겨가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며 그것이 가장 타당한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몇 년 이상 지속적으로 노력해보고 싶다면 오로지 마니아만이 알아볼 수 있는 미묘한 차이를 즐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새로움 속의 익숙함, 약간의 새로운 변화가 있는 익숙함이다. “ ㅡ 162쪽
이 부분이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어떤 것도 어제와 똑같지 않다.
미묘한 차이,
내가 그것을 알아보고 즐길만큼 되었는가
단지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몰라서 쉽게 다른 일, 물건,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ㅡ 그렇다면 결국 똑같은 길을 반복하게 될지도.
그 미묘한 차이를 즐기려면,
관심을 심화시키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였다.
나는 “ 하면 된다 “라는 말이 가진 압박감을 걱정하는 인간이므로, 뭐든지 노력하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해도 안되는 건 너무 많다) 또 나는 지나치게 근성이 있고 확신을 가진 사람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노력해도 그렇게 되긴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읽어볼만 하다. 모든 실패에 네가 끈기와 근성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라고 말한다면, 그는 글쓴이의 의도와 그릿을 잘못 이해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릿은 무작정 끝까지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무엇도 포기하지 말고,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계속하라는 것도 아니다. 혹여나 이 책을 읽고 자녀들에게 그릿을 가지라고 몰아붙일 부모가 있을까봐 걱정스럽다.
내가 일로 고민하는 동생에게 이 책을 권한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근성 있는 사람이 되라거나 포기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고난 재능이나 천재적인 뭔가를 가진 사람만이 높은 성취를 이뤄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
느리지만 꾸준함이 더 높은 성취를 이루기도 한다는 것,
때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전체적인, 더 큰 의미를 나중에야 깨닫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것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발전시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하루 하루 나아지는 것이 없고 똑같은 일, 연습을 반복하는 것에 지쳐 자신이 하는 것에 대한 애정이 시들해질 때나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 사실 미묘하게 조금 달라진 것을 찾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계속해보는 것이 필요하단 것ㅡ 이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해도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어쩔 거냐고 할수도 있다. 그럴수도 있다. 아주 높은 확률로.
하지만 결과적으로 최고가 되거나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그간의 모든 노력과 시간이 무의미한 것이 되는가? 그저 자신이 하는 것에 충분한 애정과 노력을 쏟아본 과정, 그것만으로도 난 ‘되었다’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이 될 수 없다면 물리학을 공부할 자격이 없는가? 우사인 볼트가 될 수 없다면 오늘 아침 달리기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가? 어제보다 조금 빨리, 조금 오래 달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인가? 이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딸이 내게 “엄마, 나는 절대로 모차르트가 될 수 없으니까 오늘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대답해 줄 것이다. “너는 모차르트가 되려고 피아노를 연습하는 게 아니란다.”ㅡ358쪽
동생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오늘의 이야기도 결국 내가 나에게 해주고픈 말.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후회 없이 해보는 건 중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