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EP.1 코끼리를 쏘다
<1984>와 <동물 농장>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은 작가가 되기 전 경찰이었다. 그것도 영국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 제국의 위상을 떨치던 당시, 식민지 버마를 관할하던 경찰(미얀마 주재 인도 제국 경찰).
전체주의를 혐오하고 체제비판적인 글을 써왔던 조지 오웰이 식민지 경찰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다. 이때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에세이를 썼으며, 또 그가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힘을 가진 지배자의 위치에서 영국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속마음으로는 식민지 지역의 주민들을 지지하는 데서 오는 갈등. 그러면서도 때로는 식민지 주민들에게 혐오를 드러내기도 하는 등 작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아주 솔직한 면모가 담겨 있다.
읽으면서 특정한 표현들이 거슬리기도 하였으나 조지 오웰이 인종이나 성별에 대해 그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갖지 않은 완벽한 작가라는 기대를 버리고, 또 어떤 면에서 매우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람이 또 다른 데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그게 바람직하다거나 좋다는 게 아니라, 사실적인 측면에서 인간이 그럴수 있고 실제로 우리 대부분에 그렇다는 면에서) 좀 너그럽게 보기로 했다. 자신이 속한 시대와 공동체의 가치나 문화를 100프로 초월하는 건 무리일테니. 게다가 나는 번역본을 봤으니 원서에서 어떤 단어를 썼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것에도 불구하고
이 에세이들을 참 좋다. 더 많은 글이 있는데 일부를 모아 <나는 왜 쓰는가>라는 멋진 제목의 책으로 엮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해서 다음에 또 브런치의 소재로 등장할 수 있다(등장할 것이다!).
그 중 <코끼리를 쏘다>라는 단편은 이미 오래 전에, 여러번 읽었던 건데 다시 읽어도 충격적이고 조지 오웰이 작가가 될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게끔 만드는 글이다.
스토리는 매우 간단하다.
자신의 관할지에서 코끼리가 난동을 부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코끼리를 쏘아죽여야만 했던 짧은 일화가 전부다. 그런데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았지만 쏘아 죽여야만 했던, 조지 오웰의 내적 심리 묘사가 더해지면서 내겐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제국주의의 본질, 전제적인 지배의 진실을 분명히 간파하게 된다.
그 동네 사람들은 조지 오웰을 미워했다. 당연하지. 누가 식민지 경찰을 좋아하나. 주민들은 큰 소동을 일으키거나 대놓고 뭐라 할순 없었지만, 막연하고 사소한 방식으로 조지 오웰을 괴롭혔다. 물론 힘의 논리에서 그들은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할수 없는 약자였으니 은근한 방식으로라도 영국 경찰 나으리를 골탕 먹이고 싶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 나라도 그래야 분이 쫌 더 풀렸을 거 같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대놓고 싸우자고 덤비고 욕하는 것보다 뒤에서 조롱어린 시선과 미묘하게 괴롭히는 게 당하는 이쪽에선 뭐라 크게 반격할수도 없어 더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일이다. 더구나 당시 조지 오웰은 자신의 일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이 혐오했고 제국주의는 사악하니 직장을 때려치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물론 남몰래) 더 괴로웠다고 한다.
난동 부리는 코끼리를 잡으러 간 날
그렇게 온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던 코끼리는 발정기의 발작이 잦아들어서인지 아주 평화로운 모습으로 풀을 뜯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지 오웰은 그를 쏘아서는 안된다는 걸 확신했다. 더이상 위험하지 않은 녀석을 굳이?
그러나 코끼리를 두고 집으로 가려던 조지 오웰은 자기만 바라보고 있던 2000여명의 인파, 자신이 코끼리에게 총을 겨누기를 기대하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관전하고 있는 주민들의 시선을 보고야 말았다. 그순간 그는 그 2000명의 기대와 의지가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음을, (정작 자신의 의사와는 반대인데도) 자신이 코끼리를 쏘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 없는 일이란 것도. 자신은 총을 가진 백인 경찰로서 힘 있는 주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 주민들의 뜻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꼭두각시임을 자각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투적인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 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ㅡ 38쪽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는 지배자인데도 자기 뜻대로 할수가 없다.
오히려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가면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지배자인 걸까.
코끼리를 쏘지 않으면 원주민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워서, 코끼리가 덤벼들면 그 큰 발에 깔려 되려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순간에도 조지 오웰은 자기 목숨 걱정보다 자신을 보고 있는 주민들의 얼굴만 의식했다고 적었다. 백인은 원주민 앞에서 두려움을 보여선 안되기에 오히려 보통의 경우에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사라졌다고.
결국 그는 코끼리를 쏘아 죽였다.
이 글의 마지막 한줄은 뼈를 때린다.
나는 내가 코끼리를 쏜 게 순전히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 짓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ㅡ 42쪽
이 이야기는 식민지 경찰과 식민지 지역의 원주민 간의 신경전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난 모든 인간 관계가 이와 같다고 느꼈다.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자가 우위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정말 그런 걸까. 그 힘 있음, 더 정확히 힘 있어보임을 유지하려고 그는 얼마나 ‘진짜’ 자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은하영웅전설>에서 제국의 군주 라인하르트가 자기 밑으로 오면 대우 잘 해준다고 꼬실 때, 뷰코크 제독이 말했다. 자기는 좋은 친구를 원하지, 좋은 주군을 원하지 않는다고.
대등한 관계일 때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또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으니까.
지배와 피지배.
이건 지배자에게 좋아보이지만 사실 지배 당하는 사람이 없다면, 애초에 ‘지배’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배자로서의 정체성은 철저히 피지배자에게 의존하여, 둘의 관계는 역전될 수 있다. 코끼리를 쏠지 말지 고민하는 바로 그런 순간이 오면. 이게 지배하는 인간의 이면이자 또 하나의 진실이 아닐까.
조지 오웰이 종종 생각했다던 것처럼
그 2000명의 군중 중 단 한 명도
“ 아까 그 백인 경찰 말이야. 사실은 엄청 쫄았던데? “ 라며 비웃지 않았대도, 그 진실을 아무도 몰랐대도
조지 오웰 본인이 알고 있으니,
세상 모두 다 아는 것보다 훨씬 괴롭고 무서웠을 거다.
어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사람은
이런 것까지 다 감수하고 지배자가 되려는 걸까.
그렇다면 오웰의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