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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Aug 20. 2022

K-장녀 아니고 K-막내

권력도 버리고 의무도 버리고 애정을 택함

집안 어른들이 연속으로 아프시고 일이 많았던 지난 여름, 이종 사촌오빠가 전화해서 나는 (큰딸이니 장남인) 자기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며, 요새 외롭고 힘들다고 했다. 응, 오빠 많이 힘들구나.. 그치, 외가에서는 전체로 봐도 제일 큰오빠고, 또 정이 많아서 온갖 대소사를 다 챙기는 타입이고, 갱년기가 와서 눈물까지 많아졌으니ㅡ 에고…


그렇지만 오빠의 예상과 달리 나는 그닥 큰딸 노릇을 하지 않아서 장녀라서 힘들거나 부담스럽진 않다. 우리 집은 거꾸로 되어서 막내가 맏이 같고 내가 막내 같기 때문이다. 막내 동생은 살림꾼 타입이고 본인이 나서서 챙기고 진두지휘하는 걸 좋아하는 반면, 나는 ‘그래도 내가 언닌데’ 하는 마음이 1도 없고 또 통제하거나 지휘하는 쪽으론 전혀 취미가 없어 기꺼이 동생의 지시(?)를 따르는 편이다. 가정생활 전반, 어디서 뭘 싸게 판다더라에서부터 집안 행사 챙기는 것까지 동생이 나보다 더 능력자에, 생각이 깊기 때문에 나는 이 부분에 아무 불만이 없다. 그리고 중요한 의사결정은 대등한 입장에서 다수결(?)로 결정하고, 뭐든 역할과 비용을 똑같이 부담하는 편이다. 어, 요샌 막내 동생이 더 많이 내는 것 같기도? ㅋㅋㅋㅋㅋ 그러니 큰언니라는 타이틀을 버리면 아주 편하다.


우선 동생들이 잘 해준다.

난 수박씨를 그냥 먹는 사람인데 씨까지 다 빼서 먹으라고 싸주는 막내동생^^

나도 꽤 잘 챙겨먹는 사람인데도 막내는 늘 전화해서 “ 밥 먹었어? 뭐 해줄까? 이거 먹을래? 저거 먹을래? 냉장고에 먹을 거 없지? “라고 묻고, 집에 와서 이것저것 가져가라고 한다. 둘째 동생은 새벽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언니 혼자 외롭고 힘들텐데 신경 못써서 미안하고 어쩌구저쩌구.. 언니가 없으면 너무 슬플 것 같구 어쩌구저쩌구.. 하는 인간이다. 십년 전 내가 학교 못다니겠다며 때려치우고 싶다고 했을 때 유일하게 자기가 매달 백만원씩 줄테니까, 언니가 뭘 해도 언니 편이니까 힘들면 그만 둬도 된다고 했던ㅡ 엄마랑 막내는 그만두면 뭐 할건데? 부터 따져서 계속 하라고 구슬리는 현실적인 타입. 제부는 그만 두면 안되고 그 일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모범 답안 타입. 아빠는 아무 말이 없는 타입. ㅋㅋㅋㅋㅋㅋㅋ


또, 부모님의 나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

언제가 둘째 동생이 투덜대며 “ 엄마가 언니한텐 뭐 해달라고 안 하지? 바쁠까봐 아예 전화도 잘 안하지? 엄마가 그랬대. 나는 남편 같은 딸이고 막내는 엄마 같은 딸, 언니는 자식같은 딸이라고. “ 뭐지? 그게 좋은 거야?? 난 한때 엄마가 세 딸 중에선 나를 어려워한다고 생각했다. 뭐 필요하다, 이거 사달라, 저거 주문해줘 이런 거 대부분은 막내 동생의 몫이다. 이거 좀 읽어봐줘, 컴퓨터로 수정 좀 해줘, 휴대폰 기종 알아봐줘 등은 둘째 동생에게로 갔다. 둘은 엄청 투덜대고 티격태격하며 해주는 타입이다. 근데 신기하게 내겐 해달라는 게 없었다. 근데 또 나는 그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언젠가 딱 한번 나한테 반지가 갖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비싸도 괜찮으니까 엄마 맘에 꼭 드는 걸로 하라고 백화점에서 모델 사진을 찍어 보냈을 때, 갑자기 필요 없다며 쓸데 없는 데 돈 쓰지 말하고 한 게 전부다.


7-8년전쯤 내가 엄마에게 생일 선물로 자전거와 바이올린 중 하나를 사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둘 다 사준다고 했다. 아니 이 아줌마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때 엄마가 그랬다. 넌 평생 뭘 해달라고 한 적이 없는 앤데, 니가 갖고 싶다면 두 개 다 해주고싶다고. 그리고 해준 게 없어서 늘 미안했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아서 엄마도 나한테 그런 거구나. (근데 내 주위에 우리 엄마만큼 자식들한테 택배 자주 보내는 사람 못봤는데. 이 나이에도 반찬 해서 보내고, 국은 다 끓여서 얼려 보내고, 심지어 시골 서점 가서 책도 사서 보내면서.) 그래서 결론은 엄마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자(?) “ 바이올린 사주고, 나중에 더 비싼 바이올린 사줘. 진짜 좋은 건 나같은 문외한이 들어도 소리가 다르던데. 최소 300만원이야. “로 결정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쫌 더 칭얼대고 자꾸 반찬해서 보내라고 하는 철없는 딸이 되었다. (이건 진짜 엄마를 위한 거다. 엄마의 낙이 우리에게 택배 보내는 것이므로)



물론 처음부터 큰 딸인 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집엔 나,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두 살 터울의 막내, 이렇게 세 딸이 있다. 우리 셋은 모두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을 떠나 근처 소도시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 대학을 다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나에게 큰언니로서의 권력을 주려 했다. 우리가 어릴 때 다투기라도 하면 부모님은 동생들에게 큰언니한테 대들면 안된다며 서열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3분 늦게 태어난 쌍둥이 동생이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을까 염려한 엄마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나에게 언니라고 불러 마치 언니가 내 이름인양 동생을 세뇌시켰다. (이 전략은 유효해서 동생은 한번도 나에게 ‘너’라거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 엄청 격하게 싸울 때조차 언니라고 불렀으니 엄마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방식이 너무 싫었다. 또 궁극의 싫은 것은 말하고야 마는 성격인지라 어릴 때부터 그런 편들기와 서열을 거부했다. “ 내가 언니라서 내 말 들어야 한다는 건 무슨 논리야? 엄마 아빠가 그런 식으로 편드는 거 더 싫어! “ 그 나이에 내가 무슨 평등의식 이런 게 있어서가 아니라, 언니 그딴 거 안내세워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는데, 괜히 서열 내세우니까 더 없어보인다고 생각해서였다.


우리가 어릴 땐 인신 매매 사건이 수시로 나오던 때라 그랬는지 엄마는 일찍 귀가할 것을 무척 강조했다. (엄마에게 저녁 8시면 엄청 늦은 시간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어린 나이에 도시에 나가 자취를 해서 더 걱정되었을 거다. 그래서 나에게 ‘ 언니로서 ‘ 동생들을 잘 관리할 것을 요구했다. 네가 언니니까. 엄마가 전화해서 동생들이 집에 왔는지부터 이것저것 이른바 K-장녀로서의 역할을 강조할 때, 예의 바르고 착한 딸과는 거리가 먼,, 난 늘 이렇게 답했다.


아니, 엄마 딸이지 내 딸도 아닌데
무슨 관리를 해요?
걱정되면 엄마가 직접 말해요.
그리고 언니래봐야 한 명은 3분 늦게 태어나
꼬박꼬박 언니라 불러주는 것만도 착하고,
막내는 뭐 걱정 같은 거 할 필요가 없는 앤데.
난 잔소리 하는 거 싫고,
동생이라고 통제하고 그런 것도 싫어요.
우린 그냥 친구 같은 관계라구요.
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그리고 나가 놀라고 해도
때 되면 들어오는 애들인데,
엄마는 자기 딸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
(우리 자매님들은 집순이과에 가깝다.)


그럼 엄마는 장녀 노릇을 하라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네가 언니니까’를 덧붙였다. 근데 동생들 챙기고 관리하고 그런게 잘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런 노릇에 취미가 없단 게 문제였다. 막내는 큰언니는 자유 방임이 지나쳐서 가끔 무관심한 것 같기도 해, 라는데 엄마는 딸들의 성향을 잘 몰랐다. 세 딸 중에 관리자의 역할을 맡기려면 막내 딸이 가장 적격이었고, 잘 잊어버리고 하나에 빠지면 딴 건 생각 못하는 방목형 타입의 큰 딸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나랑 둘째 동생은 본인이 말하고 싶으면 안물어도 하겠지, 말하고 싶은 상대가 되어야지 계속 캐물으면 누가 말하고 싶어하나 생각하고. 엄마랑 막내는 어떻게 안궁금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한다. 아니, 궁금해. 나도 가까운 사람, 좋아하는 사람 일상이나 그런 거 궁금한데 자꾸 물어보면 불편할까봐 안묻는 거다. 그래서 본인이 술술 말해주면 제일 좋은 것^^)


이렇게 우리 자매님들은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요즘 유행하는 MBTI 로 보면, 막내가 ESTJ 엄격한 관리자형, 나랑 둘째는 INFP 잔다르크형이니 완전 극과 극. 이렇게 다른 우리 셋의 관계가 좋은 것에 대해선 어릴때부터 잔소리, 간섭 안한 내 덕분이라고 믿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 ㅋㅋㅋㅋ이게 지나쳐서 둘 다 남편과 사이 안좋을 때 “ 그냥 헤어지고 언니랑 살까? “ 라거나, “ 우리집에서 같이 살자! “ 같은 무서운 소리를 하기도 하는 건 문제다.

내가 왜 니네랑 사니? 난 내 인생이 있는데.


성향이 달라서 좋은 점은 역할 분담이 잘 된다는 것.

막내가 이것저것 시키는 타입이지만, 또 여행 계획 짜는 건 내가 즐기고, 현지에 가서 설명해주는 것도 즐겨서 우린 꽤 잘 맞는다. (난 평소엔 무계획이나, 이벤트 계획을 좋아하는 편) 동생은 자기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해도 언니들이 아무도 기분 나빠 하지 않는게 좋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그냥 각자 잘 하는 걸 하고, 서로 고마움만 표하기로 했는데 그… 집안 일이란 게 대부분 막내가 잘 하는 것이라.. ㅡㅡ;;


엄마가 아파서 입원했을 때 나는 맨날 전화해서 “ 아빠, 밥 먹었어? 용돈 부칠테니까 맛있는 거 사먹어. 혼자 있다고 대충 먹지 말고. “라며 나름 딸노릇을 한다고 했는데, 막내 동생은 “아이고 언니, 아빠가 장히 혼자 나가서 뭐 사드시겠다.”라며 국을 포함한 온갖 즉석 식품을 종류별로 택배로 한가득 보내놨었다. 그래서 아빠는 늘 동생이 보내준 거 많이 있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래서 비비고에 빠지셨군.. 그때 동생한테 전화해서 니가 큰 딸이었어야 했다며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막내는 쿨하게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곤 택배 보내는 딸도 있어야 하지만 전화해서 맨날 보고 싶다고 칭얼대는 언니 같은 딸도 있어야 한다고, 심지어 아빠는 그걸 더 좋아할 거 안다고. 뭐 그렇다. 아빠 여행 보내드리려고 적금은 막내가 붓고, 그 돈으로 정작 모시고 가는 건 나다. “ 우리 중에 언니밖에 모시고 갈 사람 없잖아. 그리고 아빠가 언니 제일 좋아하잖아. 언니 비행기랑 숙소값도 내가 낼게. “



우리의 기울어진 권력 관계는 여섯 살 먹은 조카가 셋 중 나를 가장 동생으로 생각했다는 데서 분명해졌다. “OO 이모가 더 동생이지?”래서, 앗싸! 내가 더 어려보이는구나 했는데, 둘째 동생이 “ 좋아할 거 없어. 언니가 제일 힘 없어 보여서 그런 거니까. 애들은 권력 관계나 서열을 엄청 빨리 알아차린다구.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아는 거지. “


응… 그런 거였구나. 근데 뭐 괜찮다. 나는 그냥 같이 있을 때 재밌게 노는 이모로 충분해.


“ 근데 그래서 우리 딸이 언니 더 좋아해.

맨날 이모 보고 싶다고, 어느날은 자고 일어나서 이모 없다고 울고, 이모는 예뻐서 좋대. 먹을 거 챙겨주고 무슨 날마다 선물 챙겨주고 하는 건 막낸데, 막내 이모는 쫌 무서워하는 거 같아. 하지 말라는 게 많으니까. (근데 애들 교육시키는 건 막내가 잘 함. 군대식으로 ㅋㅋㅋㅋ) “


힘 있는 이모는 못되니

친구처럼 사랑이라도 받아야하지 않겠어?

그래서 동생이 시키는대로 하고,

조카들이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보석 반지를 서로 끼워주겠다고 다투는 이모가 되는 길을 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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