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써내려간 건강 검진 후기
퇴근하고 오니 2주 전 받은 종합 건강검진 결과지가 도착했다. 나는 5-6년 전부터 매년 여름에 건강검진을 받는다. 약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위와 대장 내시경, 뇌 MRI, 각종 초음파까지 하는 거니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하면 병원에서 5시간 정도는 있다가 온다. 알다시피 이건 무척 귀찮은 일이다. 딱히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비싼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내시경을 위해선 며칠 전부터 음식도 신경 써야 하니까.
난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하고, 하기 싫은 건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 하려고 최대한 미루는 인간에 가깝다. (대부분은 이렇죠? 나만 그런 건 아닐 거야^^;;) 이런 성향을 알기에 매년 어쩔 수 없는 두 가지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하나는 전공 관련 학회에서 발표하겠다고 신청을 하는 것인데, 사실 아무런 주제도 안정해졌고 한 줄도 안썼는데 일단 쫌 관심 있던 주제로 제목을 정해 메일을 보내고 보는 것이다. 보통 2월에 학회 간사로부터 메일이 오고, 발표는 9월 중순이니 그때까지 뭐라도 공부하고 쓰게끔 만드는 나만의 강제 전략이다. 이 전략은 지금까지 유효했다. 이게 먹히는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거나 뭔가를 한다고 했다가 취소하는 걸 어려워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간사에게 연락해서 취소한다고 사정을 설명하는 게 어려우니까, 그냥 어떻게든 꾸역꾸역 발표 준비를 하게 될 거란 걸 아니까.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것도, 취소나 거절 전화를 잘 못하는 것도 모두 내 성격에서 고치고 싶고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건데, 이게 나에게는 강제로나마 동기 부여의 효과를 높여주는 것이다. 역시 세상에 백 프로 나쁜 건 없나보다^^
(거절을 잘 못한다고 쓰고 보니 그럼 여태 나한텐 왜 그렇게 거절했어? 하고 따질 얼굴들이 떠오른다. 여러분.. 미안. ) 정정해야겠다. 사실, 하기도 싫고 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거절을 잘 한다. 하지만 지인들의 제안을 거절한 것 대부분은 시간이 없어 할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다. 미안한 마음과 약간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수락하면 나중에 바빠서 제대로 못해낼 걸 아니까. 그래서 집에서 할수 있는 일들은 대부분 거절하지 않는다. 음.. 안될 것 같은데, 대신 재택으로 하는 거면 해줄게요! 이렇게. 사실 이것도 잠을 줄여서 하는 거니, 그간 거절했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요.
할 필요가 없어도 하고 싶은 건.. 그냥 한다. 야근하고 와서 한밤중에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이나 할일이 쌓여 있는데 롤러 스케이트장에 가는 것 같은 일들. 그러므로 내게 고민을 안겨주고 강제 전략을 쓰게끔 만드는 건, 하기 싫지만 해야 할 것 같은 일들이 된다. 꼭 필요한 거니 하기 싫은 내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거지.
학회 발표에 이은 그 나머지 하나는 바로 매년 종합건강검진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학회 발표에 비해 준비 부담은 덜하지만 더 귀찮고, 검사 결과 별 게 없으면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돈과 시간이 아까울 수 있다. 그래서 이것 역시 3월초에 예약부터 하고본다. 매년 건강검진을 예약하는 나를 보며 동료 선생님이 혹시 건강 염려증이냐고 물었다. 회식에서 술 권했는데 내가 안된다고 해서. 음.. 그건 아니지만 뭐든 조기에 발견하는 게 좋고, 또 검진 날짜를 목표로 건강 관리를 더 하게 되니까요^^
남들은 평소대로 하고 가서 받아야지 건강검진 전에 신경 쓰면 결과가 정확하지 않다고 하지만(그러면서 계속 운동 가지 말고 회식 가자거나 몸에 안좋은 거 먹자고 꼬드긴다ㅡㅡ;), 뭐 암튼 나는 그렇다. 대개 검진 날짜는 여름으로 정하고, 그 날짜를 기다리며 운동도 하고 식단도 신경 쓴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운동은 좀 하시나요?, 하고 물으면 자신있게 대답하고 싶다! 그렇게 답하는 나를 상상하면 흐뭇한 마음이 든다. 그 결과 일 년 중 반년 정도는 평소보다 더 몸에 신경쓰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건강검진 준비하며 강제로 몸 관리하고, 학회 발표 준비하며 강제로 공부하게 하는 전략. 이게 내가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난 어디가 아플까봐 미리 염려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러니 골절상 걱정하는 동생을 냅두고 수십번씩 넘어지면서 롤러 스케이트를 배우고 패러 글라이딩도 하고 그런 거겠지. 오히려 시험 문제 오류 날까, 수업 시간에 어떤 말을 잘못 한 게 아닐까, 누가 상처받았을까, 아까 그 말은 너무 했나, 이런 걱정을 훨씬 많이 한다. 그치만 평소 성격과 달리 건강검진 결과지는 꽤 꼼꼼히 분석하는 편이다. 온통 알수 없는 의학용어와 영어의 나열이지만, 인터넷으로 하나 하나 검색해서 그 의미를 알고 지난 몇 년 간의 변화 양상을 비교해보곤 한다. 그래서 그냥 ‘정상’이라고 적혀 있어도 무슨 수치가 올랐고 내렸고, 그래서 뭘 좀 더 신경 써야겠다고 결론 내린 뒤에 종이를 덮는다.
나도 나한테 놀람 ㅋㅋㅋㅋㅋ (앗! 이게 건강 염려증인 건가?? 그렇다면 할 말 없구. 변명하자면, 미리 걱정하거나 불안해하기보다 병원 가서 검사받고 예방하거나 준비하면 된다는 쪽이라 검사 후의 결과 분석에 더 공을 들이는 것이다. 어치피 큰 병 아니면 별 말 안적혀 있을 건데 별거 없다고 대충 덮으면 돈과 시간이 정말 아깝고 건강검진을 왜 받았나 하는 마음이 들 것 같아서^^)
또 주저리주저리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글을 쓴 목적은 제목에서 대놓고(?) 드러나듯 자랑하기 위함이다. 인생 처음으로 받아본 결과ㅡ
나에게 저지방 근육형 몸이랜다!
헤헷, 근육형^^
그간에도 검사하면 근육은 늘 적정량으로 나왔지만, 헬스장에서 트레이너샘들이 보기보다 근육 있네요, 라고도 했지만(도대체 보기엔 어떤 거죠? ㅡㅡ;;;) 이렇게 대놓고 ‘근육형’이라고 적혀 있으니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아아아, 이거 다 지방이 아니었어!!!! ㅋㅋㅋㅋㅋㅋㅋ 우선 허벅지 돌려깎기를 전수해준 <이지은 다이어트> 유튜버 이지은씨에게 감사합니다! 근데 허벅지 돌려깎기 젤 열심히 했는데 허벅지는 얇아지지 않았고, 내 몸에서 근육이 가장 발달한 곳은 왼팔(그 다음은 오른 팔)이라는 건 안비밀ㅡ 그리고 신체 연령이 전보다 더 낮아졌고(아, 진짜 이 나이면 좋겠다.) 기초대사량이 쬐끔, 아주 쬐끔 올라 신체 발달 종합 점수가 88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음.. 일단 좋긴 한데, 이런 건 뭘로 측정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근육이나 지방이나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친데, 이런 점수는 엄청 다르게 나오는 게 이상해ㅡ 의심)
모르겠다,
그치만 평생 이런 인바디를 받아본 적 없어서 일단은 기뻐해야지^^
그러나
저지방 근육형이란 말에 좋아라~ 하던 나는 철분 수치와 스트레스 지수에 좌절하고 말았다. 빈혈이 심하다고 적혀 있긴 했지만, 막상 혈청 철 수치를 보니 허걱.. 1년 전엔 아니었는데 ㅜㅜ 당장 철분제 사야겠다. 다리에 쥐 나는 것도 철분이 부족해서라니ㅡ 그래서 바로 철분 함량이 높은 음식을 찾고 있다.
철분 높은 음식에 초콜렛도 있다니!
당장 냉장고에 있는 다크 초콜렛부터 먹어야겠다.
(솔직히 다크 넘 맛 없어. 철분은 있어도 스트레스 지수 높아질 거 같으다.. 밀크 초코는 왜 아니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