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닮은 그 남학생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특별히 누구를 더 예뻐한다거나 하는 티를 내진 않지만.. 사실 더 애정과 관심이 가는 아이들이 있긴 있다. 교사도 인간인지라 기본적으로 내가 가르치는 과목을 열심히 듣고 호응해주는 애들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치만 곰곰 생각해보면 내 수업에의 호응도와 무관하게 내가 애정을 쏟고 (속으로 열심히) 응원하는 애들이 있다. 가까이서 나를 본 동료 선생님들은 내가 어딘지 모르게 짠.. 한 애들을 좋아한다고들 했다. (이건 경제적 상황이나 그 애가 처한 가정환경 또는 사회적 위치랑 전혀 무관하다. 그리고 나는 그 표현이 싫다. 물론 한편에 안타까움이 있는 건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뿐 아니라 사실 난 그 애들에게 존경심 같은 걸 품고 있기 때문에. 짠하다고 하면 나의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꼭 동정심 때문인 것만 같아서 그런 말들이 듣기 싫었다. ㅡ 내가 그 애들을 좋아하는 건 ‘스토너’를 좋아하는 마음과 비슷하다. 나는 스토너가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고,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멋있고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부러운 마음까지 가지고 있으니까ㅡ
내가 애정을 품은 아이들은 엄청 열심히 하는데 생각만큼 결과가 좋지 않아서 괴로워하거나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하는 아이들. 변명이나 핑계 같은 거 없이 그냥 잘 안되어도 계속 하는 애들. 가끔은 그런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껴지고 속상할 땐 와서 울기도 하는 애들. 그러고 돌아서면 또 제 자리에서 묵묵히 하는 애들.
애시당초 너무 잘 하는 애들한테는 내가 별로 필요하지 않겠다 싶은데, 어떤 아이들에게는 꼭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어!, 라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가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뭐 꼭 좋은 대학이나 이름 있는 곳에 취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원하는 걸 하면서 평온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 모습 말이다.)
그 애들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모르고 있거나 스스로가 괜찮은, 꽤 좋은 사람이란 걸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겉으로 볼 땐 자신감이 없어보일지 몰라도, 그렇게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또 한고비 넘기고 또 넘기고 계속하는 모습을 보면 난 그들이 진짜 자기를 믿고 또 세상을 믿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가 좋을 때 계속하는 건 누구라도 할수 있지만, 결과가 나쁠 때도 계속할 수 있다면 제자라도 존경심이 들수밖에.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 중에도 그런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도 노력 대비 결과가 그리 좋지 않다. 또 어딘지 모르게 어리바리해서 늘 옆의 친구들이 놀려댄다. 그런데도 별 타격감이 없어서, 이 애가 친구들이 자기를 싫어해서 놀리는 게 아니라는 마음을 이해하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이 학생의 순진한 눈망울이 귀여워서 덩달아 같이 놀리고픈(?) 짖궂음이 발동하기도 했다.(사실 나도 종종 놀림을 당하는 처지라… ㅠㅠ 이런 짖궂음에 동참하면 안되지만^^;; )
어느날 그 아이가
대입 자기 소개서를 쓰게 되었을 때였다.
뭐야? 이게???? (대략 많이 난감한 소개서…)
00아, 넌 이게 왜 하고 싶어?
…
왜 좋아? 그 이유를 적어봐
…(한참 후)
선생님,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이유가 없어요.
그냥 좋은데 자꾸 이유를 생각하라고 하니까
싫어하는 건 이유를 많이 댈 수 있겠는데, 좋은 건 왜 좋은지 이유가 없어요..
아, 하하하^^
면접 가면 꼭 그렇게 말해라
아이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넌 그냥 그게 좋은 거구나, 진짜 좋아하는 거네. 아무런 득이 되는 것도, 뭘 위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걸 공부하는 게 좋다니. 내가 교수님이라면 아주 기쁠 거 같아. 내가 좋아하는 걸 너도 좋아하는구나, 하고^^
맞아, 좋은 건 그냥 좋은 건데, 그놈의 자소서가 뭔지 자꾸만 없는 이유를 만들어내라고 하고ㅡ 그 이유가 없어지면 더 이상 좋아할수 없는 것처럼
나도 옛날에 지도 교수님이 자꾸만 목적과 이유를 물어서 난감했었지. 네? 딱히 다른 이유 없는데..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건데요..(라고 하고 돌아나오면 나만 생각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지 ㅎㅎ)
그 말을 듣고 난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아이는 졸업을 하고,
나는 학교를 옮기고,
지난 스승의 날에 생각보다 더 어른스러워진(하지만 여전히 헤매고 있다는?) 문자를 보내와서, 음.. 역시 잘 지내고 있구나, 싶어 내 마음도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