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천번의 “아니요”와 한번의 “예”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번째 산>과 신해철

by 햇볕 냄새
당신이 어떤 것에도 영원히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마 어떤 것에도 깊이 빠져들지 못할 것이다. 헌신하는 인생은 소수의 소중한 “예”를 위해 수천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 데이비드 브룩스, <두번째 산> 84쪽.


무언가에, 또 누군가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마흔 살이 되던 해,

나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논문을 썼다.

그때까지 나는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도망치고 딴 짓을 했다.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취미를 배우고ㅡ 과거의 나는 경험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경험 중 어떤 것은 깊이 있는 무언가로 남지 않고 그저 순간의 즐거움으로 스쳐가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불편했다. 재미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뭔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찝찝하게 남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한다고 믿었으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딘가 한군데 뿌리를 내리고 온전히 몰입하고,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기를ㅡ 그리하여 내가 기꺼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 또 그런 사람이라면 거기에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묶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인정하고나자 많은 혼란이 사라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이전의 찝찝한 기분의 실체를

데이비드 브룩스가 <두번째 산>에서 아주 명확히 찝어줬다. 평생 두고 두고 읽고 싶은 단 한권의 책이 <스토너>라면, 나중에 누군가와 오래도록 함께 한다면 그 사람과 같이 읽고 싶은 책은 <두번째 산>이다. 첫번째 산이 개인적인 선택지가 열려 있고 자유가 넘치는 곳이라면, 두번째 산은 약속이 넘치는 곳, 자기를 내려놓고 자신을 던져버리는 헌신이 가장 큰 관심사인 곳이며, 내가 생각하는 결혼과 사랑은 그런 것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에서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둘 중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더 불행한 쪽은, 적어도 내겐 사랑과 결혼일 것 같다.)


난 비혼주의자가 아니며,

독신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다. 다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나이 때문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 로맨티스트 소리를 듣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부분에서만큼은 지극히 리얼리스트이기 때문이었다. 난 결혼 생활이 책임과 헌신, 믿음과 약속에 기반하며 한 사람의 모든 면을 감당하겠다는 엄청난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즐거움보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새롭고 설레기보단 지루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서 결혼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만 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버려야 하는데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나 들까.. 굳게 마음을 먹고 다짐해도 어려운 일을, 그런 마음조차 없이 시작할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계속 혼란스럽고 불만족하고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게 되겠지.


그러니 적당한 조건의 남자가 나를 좋아라 해주면 그냥 만나고 결혼하라는 조언(?)은 나에겐 맞지 않았다. 그건 상대에게 못할 짓이었고, 그 무엇보다도 나한테는 더 못할 짓이었다. 나는 힘든 순간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게, 또 내가 기꺼이 그간의 나를 내려놓아도 되겠다 싶을만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약속을 하고 내 마음을 줄 거였다. 내가 헌신을 약속하는 대상을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거짓 맹세를 하거나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나에게 ‘헌신’은 그런 거였다.

그래서 상대가 그저 나에게 잘 해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나 역시도 상대에게 잘 해주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그 모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밑바닥에 내가, 또 상대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런 정도의 헌신과 약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지인들 말처럼 난 진짜 눈이 높은 건지도 모르겠다.



Here I stand for you


요즘 출퇴근 시간에 꽂혀 있는 노래는

넥스트의 ‘Here I stand for you’ 이다.

이 곡의 가사를 들으면서 내가 원하는 ‘헌신’을 떠올렸다.


필요를 위해 타협하지 않고

언젠가 만날 그 사람을 위해

외로움과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것

수없이 “아니요“라고 말하며

단 한번의 “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바로 알아볼 수 있게 스스로를 준비해놓는 것

또 기꺼이 용기를 내는 것


자신을 다잡는 다짐이자

엄청난 헌신의 약속이기도 한 노랫말.

그래서 이 곡은 ‘든든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https://youtu.be/D_-SCPJ7iOk​​

이소라의 프로포즈(1997년)

Promise, Devotion, Destiny, Eternity and Love

I still believe in these words

Forever...

난 바보처럼 요즘 세상에도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

그저 지쳐서 필요로 만나고

생활을 위해 살기는 싫어

하지만 익숙해진 이 고독과

똑같은 일상도 한 해

또 한 해 지날수록 더욱 힘들어

등불을 들고 여기 서 있을께

먼 곳에서라도 나를 찾아와

인파 속에 날 지나칠 때

단 한 번만 내 눈을 바라봐

난 너를 알아 볼 수 있어 단 한 순간에

Cause Here, I stand for you

난 나를 지켜가겠어 언젠간 만날 너를 위해

세상과 싸워 나가며 너의 자릴 마련하겠어

하지만 기다림에 늙고 지쳐 쓰러지지 않게 어서 나타나줘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난 아직 믿습니다.

영원히...



유튜브에서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가끔 듣는다. 스님은 아주 유쾌하면서 직설적이다. 사람들이 결혼이나 연애, 가족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 스님이 혼내면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니, 자꾸 무슨 거래를 하려고 해요?


늘 웃으며 약간은 장난스런 어투로 하는 말이지만

대부분의 관계가 망가지는 이유를 콕 집었다.


‘계약’은 ‘거래’이다. 약속은 ‘관계’이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계약은 이해관계가 걸린 것이고 약속은 정체성이 걸린 것이다. 너와 내가 합쳐져서 ‘우리’가 되는 문제이다. 거래가 ‘이득’을 가져다주고 약속이 ‘변화’를 가져다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ㅡ <두번째 산> 147쪽


헌신의 약속은 나를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지만,

거래는 나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물론 상대방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