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브룩스의 <두번째 산>과 신해철
당신이 어떤 것에도 영원히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마 어떤 것에도 깊이 빠져들지 못할 것이다. 헌신하는 인생은 소수의 소중한 “예”를 위해 수천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 데이비드 브룩스, <두번째 산> 84쪽.
무언가에, 또 누군가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마흔 살이 되던 해,
나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논문을 썼다.
그때까지 나는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도망치고 딴 짓을 했다.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취미를 배우고ㅡ 과거의 나는 경험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경험 중 어떤 것은 깊이 있는 무언가로 남지 않고 그저 순간의 즐거움으로 스쳐가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불편했다. 재미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뭔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찝찝하게 남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한다고 믿었으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딘가 한군데 뿌리를 내리고 온전히 몰입하고,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기를ㅡ 그리하여 내가 기꺼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 또 그런 사람이라면 거기에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묶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인정하고나자 많은 혼란이 사라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이전의 찝찝한 기분의 실체를
데이비드 브룩스가 <두번째 산>에서 아주 명확히 찝어줬다. 평생 두고 두고 읽고 싶은 단 한권의 책이 <스토너>라면, 나중에 누군가와 오래도록 함께 한다면 그 사람과 같이 읽고 싶은 책은 <두번째 산>이다. 첫번째 산이 개인적인 선택지가 열려 있고 자유가 넘치는 곳이라면, 두번째 산은 약속이 넘치는 곳, 자기를 내려놓고 자신을 던져버리는 헌신이 가장 큰 관심사인 곳이며, 내가 생각하는 결혼과 사랑은 그런 것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에서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둘 중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더 불행한 쪽은, 적어도 내겐 사랑과 결혼일 것 같다.)
난 비혼주의자가 아니며,
독신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다. 다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나이 때문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 로맨티스트 소리를 듣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부분에서만큼은 지극히 리얼리스트이기 때문이었다. 난 결혼 생활이 책임과 헌신, 믿음과 약속에 기반하며 한 사람의 모든 면을 감당하겠다는 엄청난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즐거움보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새롭고 설레기보단 지루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서 결혼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만 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버려야 하는데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나 들까.. 굳게 마음을 먹고 다짐해도 어려운 일을, 그런 마음조차 없이 시작할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계속 혼란스럽고 불만족하고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게 되겠지.
그러니 적당한 조건의 남자가 나를 좋아라 해주면 그냥 만나고 결혼하라는 조언(?)은 나에겐 맞지 않았다. 그건 상대에게 못할 짓이었고, 그 무엇보다도 나한테는 더 못할 짓이었다. 나는 힘든 순간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게, 또 내가 기꺼이 그간의 나를 내려놓아도 되겠다 싶을만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약속을 하고 내 마음을 줄 거였다. 내가 헌신을 약속하는 대상을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거짓 맹세를 하거나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나에게 ‘헌신’은 그런 거였다.
그래서 상대가 그저 나에게 잘 해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나 역시도 상대에게 잘 해주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그 모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밑바닥에 내가, 또 상대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런 정도의 헌신과 약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지인들 말처럼 난 진짜 눈이 높은 건지도 모르겠다.
Here I stand for you
요즘 출퇴근 시간에 꽂혀 있는 노래는
넥스트의 ‘Here I stand for you’ 이다.
이 곡의 가사를 들으면서 내가 원하는 ‘헌신’을 떠올렸다.
필요를 위해 타협하지 않고
언젠가 만날 그 사람을 위해
외로움과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것
수없이 “아니요“라고 말하며
단 한번의 “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바로 알아볼 수 있게 스스로를 준비해놓는 것
또 기꺼이 용기를 내는 것
자신을 다잡는 다짐이자
엄청난 헌신의 약속이기도 한 노랫말.
그래서 이 곡은 ‘든든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https://youtu.be/D_-SCPJ7iOk
Promise, Devotion, Destiny, Eternity and Love
I still believe in these words
Forever...
난 바보처럼 요즘 세상에도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
그저 지쳐서 필요로 만나고
생활을 위해 살기는 싫어
하지만 익숙해진 이 고독과
똑같은 일상도 한 해
또 한 해 지날수록 더욱 힘들어
등불을 들고 여기 서 있을께
먼 곳에서라도 나를 찾아와
인파 속에 날 지나칠 때
단 한 번만 내 눈을 바라봐
난 너를 알아 볼 수 있어 단 한 순간에
Cause Here, I stand for you
난 나를 지켜가겠어 언젠간 만날 너를 위해
세상과 싸워 나가며 너의 자릴 마련하겠어
하지만 기다림에 늙고 지쳐 쓰러지지 않게 어서 나타나줘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난 아직 믿습니다.
영원히...
유튜브에서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가끔 듣는다. 스님은 아주 유쾌하면서 직설적이다. 사람들이 결혼이나 연애, 가족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 스님이 혼내면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니, 자꾸 무슨 거래를 하려고 해요?
늘 웃으며 약간은 장난스런 어투로 하는 말이지만
대부분의 관계가 망가지는 이유를 콕 집었다.
‘계약’은 ‘거래’이다. 약속은 ‘관계’이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계약은 이해관계가 걸린 것이고 약속은 정체성이 걸린 것이다. 너와 내가 합쳐져서 ‘우리’가 되는 문제이다. 거래가 ‘이득’을 가져다주고 약속이 ‘변화’를 가져다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ㅡ <두번째 산> 147쪽
헌신의 약속은 나를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지만,
거래는 나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물론 상대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