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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May 14. 2023

자신을 규정짓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때 일어나는 일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제인 오스틴의 위대함

난 제인 오스틴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에 영화 <오만과 편견>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나 역시 그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고, 친한 언니가 본인이 읽은 책 중 제일 재미있는 고전이라고 극찬하면서 추천했어도, 난 그 이야기들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몰랐었다. 그냥 영국 시골에 사는 몰락한 귀족이나 평범한 여자들의 남편감 찾기, 난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정은 안가는 속물적인 엄마, 자매 중 한 명(주로 큰딸)은 전통에 순응해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랑 결혼해 그럭저럭 살고, 주로 둘째인 여자 주인공은 당차고 지적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상 자신이 꿈꾸는 남자랑은 처지가 안맞고.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이 이뤄지는 이야기 아니냐고. 이게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거야? (따지고 보면 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다.- 원래 조금 아는 인간이 제일 용감한 법;;; 반성한다 ㅠㅠ)


그 남편감들이 아주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였다면 내 마음이 달랐을까. 글쎄.. 제임스 맥어보이 같은 인물이 등장했다면 달라졌을 것도 같고^^;; - 실제로 제인 오스틴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 <비커밍 제인>에 맥어보이가 등장하지 - 그리고 난 그 영화를 <오만과 편견>보다 훨씬 더 좋아하지. 맥어보이 눈빛에 어쩔 수가 없었던 어린 날의 나ㅡ

영화 <비커밍 제인> (2007, 줄리언 제롤드 감독) 스틸컷

하지만 주인공 때문이 아니라, 그 영화의 줄거리와 러브 스토리가 <오만과 편견>보다 내겐 더 재밌었다. 영화를 본 뒤 다시금 <오만과 편견>을 펼쳤으나, 절반쯤에서 내 인내심은 또 다시 바닥나버렸더랬다. 아, 도대체 뭐가 재밌지? 이 남자들은 또 왜 이러는 거야ㅡ 평소 소설 속 많은 찌질한 캐릭터에도 공감해주고 관대하던 내가 사라지고, 이 남자들의 못남(내 눈에 비친)은 극대화되어 소설 읽는 맛이 없었다. 그래서 또 반만 읽은 채 책장에 꽂혔다.



아, 버지니아 울프는 제인 오스틴을 왜 그렇게 좋아해?


몇 년 후.. 이제는 그마저도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제인 오스틴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버지니아 울프 덕분이었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을 비교하며 제인 오스틴에게 깊은 애정과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 울프는 브론테가 더 천재적인 작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이 차별받던 바로 그 시대에 '여성'이라는 자의식에서 벗어나 글을 썼다는 바로 그 점에서 제인 오스틴을 높게 평가했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러한 분석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 책이 1900년대 초반, 영국의 여학생들이 다니던 칼리지에서 했던 '여성과 픽션'이라는 강연의 원고를 수정한 것이라는 점과 페미니스트 평론으로 간주된다는 역자의 말을 상기시켰다. 난 이 책을 거의 다 읽을 때까지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했지.


그런데 다 읽고나니 이건 작가 지망 여대생만이 아니라,

꿈을 가진 사람들ㅡ

특히 사회에서 ‘넌 안될 거야’라고 하거나 현실적으로 꿈을 이루기에 어려움이 많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자기만의 고유한 공간과 시간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글은 이미 썼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은 울프가 말한 제인 오스틴의 위대함에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잊었다는 거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짜 자기 자신을 보여주었다는 거였다.


그녀는 사회가 틀 지어놓은 ‘나’라는 존재,

그 틀에 사로잡힌 채 우리 스스로가 규정하고 의식하는

‘나’라는 존재 ㅡ

그래서 때론 나와 다른 처지의 상대에게 원망을 품거나 불공정한 세상에 억울함을 느끼는 나ㅡ 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글 쓰기)에만 몰두했다. 특히 ‘여자’라는 틀로 규정해놓은 모든 것을 잊고 글을 썼다고, 그래서 그 글에는 남자에 대한 아무런 원망이나 복수심, 분노 같은 게 없었다고. 또 그 덕분에 실제 여성으로서 자신이 가진 장점이 잘 살아있는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어떤 성별을 가진 사람도 기꺼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되었다고. 그 역시 자기만을 위한 방 한칸이 없는, 남녀가 불평등한 세상 속에 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자기만을 위한 방 한 칸과 연간 일정 수준의 생활비를 확보하라는 건, 그래야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는 삶을 살수 있으며, 또 그래야 남자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건 단순히 편안하게 방해 안받고 글을 쓸수 있는 물질적 조건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제인 오스틴을 평가하며 여학생들에게 했던 저 말이 아주 깊이 와 닿았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다 읽어보지 못했으니 그 평가가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른다(하지만 <오만과 편견>뿐 아니라 < 엠마>, <설득> 등 그녀의 수많은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검색해보다가 제인 오스틴만큼 그 작품이 영화로 많이 만들어진 작가가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많아서 놀랐다!)


난 울프의 말이 맞을 거라 믿는다(또 그러기를 바란다).

그리고 적어도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그게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든)을 잊은 채 글을 써내려간 제인 오스틴이 위대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것이 내가 처한 현실이라면 그 모든 것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음.. 그 말도 맞다. 그러나 자신을 모르는 것과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잊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난 영화 <비커밍 제인>을 보며 그녀가 누구보다 자신의 현실, 당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느꼈다. 그 앞에서 무너지기도 하고 막막해하기도 했다고. 그러니 그녀는 더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다 잊고서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썼으니까, 그리고 제인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버지니아 울프는 혁명가가 아니라 작가가 되고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자질을 말하고 있었다. 창조적인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가 창조할 수 있는 세계는 과연 얼마나 될까.


난 저 위대함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적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온전히 푹 빠질 때 닿을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수 있고, 보여줄 수 있다.


나도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에 대한 확신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진짜 하고싶은 것, 또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잊은 채ㅡ



얼마전 유튜브 침착맨 채널에서 김풍 작가와 정지우 작가가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고민상담해주는 걸 봤다. 그 끝에 정지우 작가가 사랑을 보는 여러 관점을 소개하며 ‘사랑은 생각이다’라는 얘길 했다.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이 사람이 사실 내가 수용하기 어려운 과거를 가졌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면, 그를 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면서 사랑은 우리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고 했다. 내겐 아름다움이 그랬다. 나는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상대의 외모를 인식한다. (이른바 하는 짓이 이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겉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콩깍지형 인간 ㅎㅎ) 그러고보니 사랑이 생각이라는 말도 제법 공감이 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난 제인 오스틴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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