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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Apr 23. 2024

악역인 것을 모르고 싶은 악역

크리스토퍼 놀란, <다크 나이트>

김창완 아저씨는 악역을 맡을 때 그게 어떤 역이든 상관하지 않지만, 감독에게 한 가지를 부탁한다고 했다.


내가 악역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게 해달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궁금했다.

왜 자신이 맡은 역의 정체를 모르게 해달라고 하지?

(인터뷰에서는 자세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배우이고, 악역을 맡는다면 어떨까?


음, 우선 나는 내가 악역이라는 것을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 감독님이 이번에 니가 맡은 역할은 진짜 나쁜 놈이야, 라고 말해주면 그에 맞춰 더 실감나는 연기를 준비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 (설령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있고, 남들이 모두 나를 악인으로 본다 해도) 나 자신은 내가 악인이라는 것을 끝까지 모르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에 정당한 이유나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간다. 남들이 보기엔 잘못된 선택처럼 보여도, 스스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더 나은(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선택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설령 잘못된 습관이나 중독 때문에 그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선택한다고 해도 자신이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라고 믿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며 사는 것은 지옥에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연기라는 것이 분명하고, 내가 실제의 ‘나’와 ‘내 역할’을 분리한다면, 그래서 악인을 연기하면서도 이게 연기임을 의식하고 있다면 내가 악역인 것을 알아도 되지만ㅡ

내가 그 인물에 몰입하여 연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한 인간의 생애를 푹 빠져 살아낸다고 한다면, 내가 악역인 것을 모른채 내 삶에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더 좋다, 라는 건 옳다 그르다 그런 것보다, 그 당사자가 삶을 살아가기가 더 나을 거란 뜻이다.)


김창완 아저씨가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위와 같은 내 나름의 이유로 이해될 거 같았다.



이제서야 <다크 나이트>,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을 봤다.


희대의 악역, 조커.

조커는 첫장면부터 나 완전 나쁜 놈이오! 하고 등장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데 별 이유가 없었다. 방금전까지 같이 이야기하던 사람을 쳐다 보지도 않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여버린다. 그렇게 살인을 하는 이유가 복수라거나,  권력과 돈이 필요해서라거나.. 뭐 그런 것도 아니다. 자기도 위험에 처하고 얻어터지면서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캐릭터는 호러 영화 속 귀신(호러 영화 안본 티가 너무 나나^^;;)처럼 무섭다, 라는 느낌보단 불쾌하고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도대체 왜?


조커는 사람을 죽이고, 또 사회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테스트하며 착한 척, 위선 떨지 말라고 몰아부친다. 이래도? 응?? 이래도 니가 끝까지 위선을 떨 수 있는지 보자. 거봐, 너도 나 죽이고 싶지? 때리고 싶지? 이런 상황에 놓이면 너도 너 살자고 남을 죽이지 않을거야? 인간은 다 그런 거야. 그러니까 고고한 척 하지 말라고!


조커는 인간이 지닌 ‘선의’라는 것을 믿지 않는 듯 했다. 인간에게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면모가 있지만, 동시에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염려하는 동정심과 공감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러니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인 거겠지. 하지만 조커에게 인간은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다. 그는 자신이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고 죽이는 것처럼 남들도 속으로는 그러고 싶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비처럼 가장 순수했던 인물을 복수심에 눈멀도록 이끈다. 자, 봐라!


그런데 대체 왜

그는 인간의 위선이라는 것에 이리도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을 까발려서 그에게 좋은 것이 뭔가?


그러다 김창완 아저씨의 저 말을 듣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악역이 아닐까. 모두를 자신과 같이 이기적이고 나쁜 본성이 있다는 것으로 끌어내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지독한 자기 혐오에 빠지느니 차라리 남들도 나와 같다, 아니 저들은 착한 척까지 하는, 나보다 더 나쁜 놈들이다, 로 결론을 지어야만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


일상에서도 남의 본심을 끝까지 파헤치고 너도 별수 없잖아? 로 끌고 가는 이들이 조커와 같은 마음 아닐까? (물론 정도는 다르지만)



뜬금포ㅡ


위선,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상대에 대한 예의나 배려라고 부르는 것들, 하얀 거짓말들, 그런 것은 때론 내 민낯이 아닐 수도 있으나, 그 민낯을 가리려고 애쓰는 자체가 위선은 아닐 것이다. 조커와 하비는 비슷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악과 선의 양극단에 서 있으면서 인간이란 존재를 단순화하고 이분법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실제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으면서 때론 거짓말과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 자신과 무관한 남을 돕기도 하면서 사는 복잡하고 모순된 존재,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다. 그런 인간의 면모를 이해한다면, 자신이 가진 이기적인 면모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상대에게 네 모든 민낯을 다 드러내고, 본심을 밝혀! 라고 몰아세우는 일은 하지 않겠지.


정직함,진실함은 미덕이지만

그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닐 수도 있겠다, 와

투사는 위험한 것이라는 뜬금 없는 결론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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