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미스씨와 '필리버스터'

프랭크 카프라,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by 햇볕 냄새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의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수적 우위를 이용해 법안이나 정책을 통과시키는 경우를 막기 위해 소수 정당이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의사 진행을 방해한다고 하니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질 수도 있으나, 법률이 정한 범위 내에서 한다면 합법적인 행위이며, 다수당의 횡포를 방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필리버스터는 무제한 토론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일부러 긴 시간 발언을 하기도 하며 불법이 아닌 한 다양한 방법을 써서 표결을 방해한다. 찾아보니 우리나라의 경우 국회법 제106조의 2에서 '무제한 토론'의 형태로 필리버스터를 허용하고 있다.

<국회법> 제106조의2(무제한토론의 실시 등)
① 의원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이 법의 다른 규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토론(이하 이 조에서 “무제한토론”이라 한다)을 하려는 경우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이 경우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토론을 실시하여야 한다. ......
⑤ 의원은 무제한토론을 실시하는 안건에 대하여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서명으로 무제한토론의 종결동의(終結動議)를 의장에게 제출할 수 있다.
⑥ 제5항에 따른 무제한토론의 종결동의는 동의가 제출된 때부터 24시간이 지난 후에 무기명투표로 표결하되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이 경우 무제한토론의 종결동의에 대해서는 토론을 하지 아니하고 표결한다.

나에게 ‘필리버스터’라고 하면 오래 전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봤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라는 영화 속 주인공 스미스씨가 떠오른다. 청소년을 위한 캠프를 만들려고 하는 초짜 정치인 스미스가 댐을 건설하려는 기성 정치인에 맞서 열변을 토하는 장면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그때 스미스가 썼던 것이 바로 필리버스터였다. 그는 밤새, 땀범벅이 된채 미국의 헌법 정신에 대해 말하고 또 말했다.


그러나 그간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보여준 필리버스터는 스미스씨처럼 감동을 주진 못했다. 오히려 아니, 필리버스터를 할거면 의제에 대해 더 깊이 토론하고 발언해야 하는 거 아냐? 딴소리로 시간을 끄는 건 너무 비생산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 제도가 왜 필요한가, 라는 생각을 했다. 또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토론만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야 할까, 말로 아무리 해도 씨알도 안먹힐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면 소수에게 좀 더 다양한 발언이나 반대 행위를 허용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 ㅡ


필리버스터는 더 깊은 논의와 토론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수의 횡포를 막는 장치로서 하나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표면적으로는 의제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거라 해도,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나는 “ 달리 생각하며, 내 목소리도 들어주시오. “라는 간절한 외침일테니ㅡ


찾아보니 미국의 경우에는 필리버스터를 할 때 반드시 의제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도 발언이 가능하다고 한다. 드물지만 성경이나 긴 희곡 같은 것을 낭독하며 시간을 끌기도 한다고.


잠시 우리나라 의회에서 국회의원이 책을 낭독하며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좀 엉뚱한 듯 하지만 이 정도면 귀엽고 점잖은 방해 아닌가


(그러나 마음 한켠에선 언젠가 스미스씨의 감동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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