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래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by 햇볕 냄새

얼마전 라디오에서 정여울 작가가 쓴 ‘어쩌면’과 ‘역시나’라는 두 개의 부사가 지닌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단정하지 않고 자신이 모르는 이면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반면, ‘역시나’라는 말은 실망과 좌절을 준비할 뿐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고 단죄한다는 것이었다. 그럴듯한 이야기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무심코 쓰는 언어에 그런 힘이 있었지. 부사는 주어나 동사, 목적어처럼 문장이 성립되는 데 문법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빼 버리면 뭔가 결정적인 것이 사라진 듯한 허전함이 든다. 부사의 기능은 문장 전체, 동사와 형용사 등을 수식하는 ‘꾸밈’인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보이는 이 사소한 것이 “네 생각이 났어.” 와 “문득(갑자기) 네 생각이 났어.”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나는 어떤 부사를 즐겨썼던가.

어쩐지, 왠지 모르게, 그냥, 문득, 언젠가, 오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래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부사가 주는 느낌을 좋아했다. 어쩐지(^^;;) 온갖 역경이나 한계를 극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멋있기도 했고, 특히 사랑한다는 말 앞에 이 부사를 집어넣으면 그 마음이 조금 더 깊고 진짜 같기도 했다. 내가 가진 약점이나 단점을 다 알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니까, 이 얼마나 황홀한 고백인가. 어느 평론가도 사랑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적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 약점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약점 때문에(그래서) 내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한 차원 높은 사랑을 바라는(받음과 동시에 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 아, 이래서는 평생 짝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이것은 비단 남여 간의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면, 슬픔에도 불구하고 노래하기보다는 그냥 슬퍼서 노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프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견디기 보다 그냥 아프다고 기대어 울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_ 나는 이 말에서 앞 문장에 대한 강한 부정을 느낀다. 앞의 이야기가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면 이제부터 나올 말은 부정적인 것이다(이런저런 거 다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니야.). 앞의 이야기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마음과 함께 의지로든 뭐로든 극복하려 애쓰는 마음을 엿본다(이런저런 것은 별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 보자.). 이 글을 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로만 삶을 살아도 아주 훌륭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후자의 태도라면 연인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쁠 것이 없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래서'라는 말을 듣고 싶다. 나는 누군가가 힘들여 애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더욱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와의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나를 위해 애써주는 마음보다 그 자신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자세도 정말 감사하지만) 기왕이면 ‘그래서’의 마음으로 나를 대해주었으면 좋겠다.


무언가 결핍된 사람들은, 그 결핍 때문에(그래서)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늙고 병든 로자 아주머니를 돌보는 모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로자 아줌마는 그렇게 못생긴 것도 아니었다. -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228쪽)


결핍이 오히려 장점이 되고, 그것 때문에 상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

못생겼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하게 된다는 게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의 아름다움과 강함, 부유함, 힘이 아니라 그가 지닌 아픔과 나약함,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 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완벽한 존재가 아니니까, 그 아픔과 결핍에 공명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 아름답고 아니고는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는 에밀 아자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를 왜 사랑하느냐고?


대학 시절,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모두가 한마디씩 추천하던 책,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나를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라고.

" 나를 왜 사랑하는 거야? "

그에 대한 답이 무엇이면 좋을까. 너의 얼굴이 이뻐서, 똑똑해서, 착해서, 목소리가 좋아서...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들으면 가장 기쁠까.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만큼 나를 사랑하니?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알랭드 보통은 그게 진짜 시험이라고 말한다. 진짜 시험.

그 시험은 통과하는 사람은 멋지다. 대단하다. 아마 우리는 그런 것을 찐사랑이라고 부르겠지. 하지만 시험이 가능하려면 응시자보다 먼저 출제자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키는 자신의 약한 부분을 보여줄 수 있는 쪽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정말로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거니까. 그 다음은 응시자의 몫이다. 어떤 이야기는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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