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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Aug 31. 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인간의 품위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아베 총리가 총격으로 사망했을 때, 다음 날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기사 보고 어땠어요?


나? 음.. 안타까웠어. 정치적인 면에서 아베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 걸 떠나 한 인간의 죽음으로서는 그렇게 떠났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 그리고 아베 총리의 사망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실망스러웠어. 양국의 관계나 역사 문제가 있다 해도, 어찌 됐든 누군가의 죽음 앞에 잘 되었다는 식의 조롱하는 글은 보고 싶지 않았거든.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냥 고개를 끄덕했다. 평소였다면 샘 친일파냐며 놀려댔을 다른 애들도 조용했다. 그리고 우린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의 눈빛에서 내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3년전인가, 예술의 전당에서 탱고 공연을 보다가 충격적인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본격적인 탱고 댄스 공연이 시작되기 전, 1부 연주를 맡은 일본 밴드가 공연을 할 때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성 멤버가 한국어로 인사를 준비해왔고, 서투른 발음이지만 곡의 의미도 한국어로 소개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는 그런 게 당연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난 그때 서투른 한국어를 열심히 외워온 그녀가 귀엽고 고마웠다.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가 이야기하던 바로 그때 객석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렸다.

방금 그게 뭐였지? 모두가 놀라 웅성대는 순간, 한 아주머니가 객석에서 일어나 커다란 소리로 무대를 향해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나는 정확히 “ 쪽바리 “라는 말을 들었는데, 두 귀로 듣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무대위의 밴드와 바이올리니스트도 당황했음이 분명했다. 그 아주머니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일어나 마치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객석을 걸어나갔는데, 그 모습을 보자 내가 그런 것이 아닌데도 부끄러움이 밀려와서 미칠 것만 같았다. 무대 위의 밴드에게는 미안하기만 했다. 나머지 관객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더 힘차게 박수를 치며 그들을 응원했고,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그날의 공연은 아주 멋졌다.

그러나,

그래서 더더욱 내 마음은 씁쓸했다.

나는 두고두고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밴드보다, 그런 말을 내뱉고도 당당해하던 아주머니 때문에ㅡ 설마 본인이 애국자라고 생각하신 걸까.



작년 여름에 쓴 노트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글이 적혀 있었다. <걷는 듯 천천히>라는 에세이에서 베껴적었던 건데, 필사까지 한것을 보면 나는 이 글이 퍽 마음에 들었던 게 틀림없다. 보편성에 대한 것, 영웅과 평범한 인간,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은 욕망.. 감독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왜 그런 영화가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꼭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잘 아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 중 하나는 칸 영화제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가 상영되었을 때 고레에다 감독이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담은 글이었다.

그가 작품 속에서 부시를 비판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장내의 웃음이나 박수는, 상영 전후 무어 감독을 향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상영중의 야유에 가까운 웃음에서는 양질의 지성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거북함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부시가 상대를 업신여길 때 짓는, 품성이 결여된 경박한 웃음과 어딘가 깊은 곳에서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함은 문제 삼지 않고, 상대를 이해력 없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런 품위 없는 태도가 부시의 본질이라면, 설사 부시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쪽은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진정한 의미의 ‘반부시’가 아닐까.ㅡ 160-161쪽

부시 이야기라니 한참 오래 되었다. 하지만 나는 감독이 이야기하는 그 거북스런 분위기를 금방 알것 같았다. 우리도 누군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정치인이나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쉽게 이런 모습을 보이니까.


나는 고레에다 감독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상대를 비판할 때, 설령 그가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이라 해도, 그 비판의 방식에는 품위가 필요하다. 주제의식이나 내용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 역시 저런 분위기가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정치적인 입장과 생각이 달라도 인간으로서 상대를 모욕하거나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사람들은(이 사람들과는 내가 의견을 같이 한다 해도) 멀리하게 된다. 특히 자신은 옳기 때문에, 잘못된 타인에게 그런 태도를 보여도 된다는,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하는 게 더 정의롭고 도덕적이라는 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더욱 멀어진다. 그 정의와 도덕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는 보여줄 수 없는 걸까.


나는 목적 이상으로 수단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한대도 한 인간에 대한 조롱과 무시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는 이해관계나 입장 차이를 떠난 인격, 인간으로서 지켜야 도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에도 할 말 못할 말이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으니까.



그래서 모두가 웃으며 함께 그 영화를 볼때, 불편해했을 고레에다 감독을 나는 더 믿는다. 나는 정치적인 의견의 일치 여부 이런 것보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쉽게 선인과 악인, 우리 편과 적으로 양분하지 않고, 모든 인간이 가진 복합적인 면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좋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대학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만들었다. 나는 그의 <어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박사 논문에 실었다. 이동진씨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빠(^^ 본인도 대놓고 고빠라고 인정하심)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나는 앞으로도 그의 영화를 기대하고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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