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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Sep 02. 2022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의식(ritual)

사샤 세이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얼마전 인터넷에서 부부싸움 후 화해한 이야기를 적은 글을 봤다. 싸우고 나서 엄청 어색하고, 누구도 먼저 미안하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집은 주말이면 가족이 함께 카페에 가서 책 읽고 작업하는 것이 관례였던가보다. 그래서 싸운 후의 어색함을 안은 채 카페에 갔고, 주문하고 사진을 찍으며 자연스럽게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는 얘기였다. 뭐 먹을 거야? 이거 먹을래? 이런 말이라도 해야 주문을 할 수 있으니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는ㅡ

아마 나중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빵! 웃음이 터지지 않았을까.


아무리 크게 싸웠어도 주말엔 함께 카페에 간다ㅡ

굳이 다툰 뒤의 화해법이 아니라도, 아주 좋은 의식이다. 지금은 크게 의식(^^)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쌓여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주말이면 그 때, 그 곳, 그리고 함께 있었던 사람, 감정과 기억들이 불쑥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그리움도, 용서도, 화해도, 감사도 가능하게 할 거라 믿는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남자친구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전화하는 게 싫었다고 했다. 퇴근하면서 늘 전화를 거는 남자, 조금도 예상 밖의 면모가 없이 본인이 예상한대로 움직이는 게 싫었다고. 그 얘길 듣던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난 좋은데, 그런 남자.

일 끝나고 퇴근할 때나 잠들기 전처럼,

일정하게 연락하는 사람이 더 좋아 난.


다소 즉흥적인 면이 있고, 계획을 세워도 그날의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동하고, 반복되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이상하게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이런 일정한 리듬이 있는 사람이 좋다.


정해진 날짜, 시간에 무언가를 함께 하는 의식,

단순히 정해진 것을 반복하는 습관 같은 루틴(routine)이라는 말보다, 꼭 지켜야 할 신성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 같은 리츄얼(ritual)이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나는 가까운 사이에서 친밀감을 느끼거나 갈등을 풀어가는 데 이런 식의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로의 애정을 지속하고 확인하는 데도. 소소하지만 반복되는 그 일상의 힘이 깜짝 서프라이즈나 비싼 선물보다 훨씬 더 크고 소중하게 와닿는다. 상대의 일상 속에 나도 들어가 있고, 내 일상 속에도 상대가 들어와 있고.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는 그런 일상적인 의식.


뭘 그런 걸 확인하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가 확실히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의 딸 사샤 세이건이 쓴 책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는 바로 그런 의식들에 대한 이야기다. 연인이나 부부 간의 의식에서부터 우주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식까지. (우주라니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 정신 같은 걸 놓지 않는 게 핵심이다.)

어느 날 사샤 세이건은 남편과 택시를 탔다가 기사에게서 함께 노래를 불러 보라는 강요를 받는다. 두 사람은 노래를 잘 못한다고 사양했으나 기사는 막무가내로, 그냥 알파벳 노래라도 불러보라고 권했다. 알고보니 아주 현명한 분이다^^


“ 일주일에 한번, 꼭 같이 노래를 해요.

같이 그렇게 즐기면 사이가 돈독하게 유지될 거예요. “


처음엔 어색해하며 노래했지만, 끝내고나자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는 그녀는 그 알파벳 노래를 남편과의 소중한 의식으로 만들었다. 주로 토요일 아침,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부르지만 열렬히 사랑할 때도, 서로에게 화가 났을 때도, 어디 가야 해서 정신 없이 바쁠 때도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심지어 떨어져 있을 땐 전화로 노래를 했다고.


눈이 마주치면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함께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노래를 부르는 부부를 상상해본다.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은 이해 못할 유치한 노래를 공유하는 사이는 자신의 모든 이상한 점을 다 내비쳐도 되는 사이다.


노래 부르기도 그랬지만 사샤가 남편 존과 매일 한다는 작은 의식들이 더 마음에 남았다. 그녀의 남편도 매일 퇴근 때 문자를 하는, 예상 가능한 사람이다.

매일 이런 작은 의식을 함께 했다면

조금 실망스런 일을 했다거나 말다툼을 했다고

그 사람이 꼴도 보기 싫어지진 않을 것 같다.



20대 시절 자매님들과 일본 드라마에 빠져 컵라면을 쌓아놓고 덕질하며 살던 때ㅡ 수많은 일드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드라마는 <롱 베케이션>이었다. 결혼식날 신랑될 사람이 도망가버려 혼자 남겨진 여주인공(미나미)이 남편을 찾아간 집에서 그의 후배인 피아니스트와 함께 살다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이야기를 야마구치 토모코와 기무라 타쿠야가 연기하면서 인생 드라마가 되었다. 나는 결국 기무라 타쿠야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기무라가 좋은 게 아니라, 세나(극중 역할)가 좋은 거야. “라고 동생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나중에 이상한 코미디를 보고 인정해야 했다. 이런 코미디마저 소화하다니! 더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아, 나.. 기무라 타쿠야 좋아하는 거였어..)


세나는

자기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결혼식 당일날 신랑이 도망가버린,

세심한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덤벙대고 씩씩해 보이는 미나미를 좋아한다.

그 밝고 명랑한 웃음 뒤에 감춰진 쓸쓸함, 작은 모습까지.


모델일을 계속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게 아닌가, 자기에겐 더 이상 아무런 기회가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미나미에게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땐 신이 주신 긴 휴가, 롱 베케이션이라 생각해보라며 위로하는 세나. 여느 드라마처럼 삼각관계와 오해, 일과 사랑 간의 갈등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마지막 씬에서 두 사람은 함께 미국행을 결정하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때 미나미가 이렇게 말한다.


세나와 함께라면
다투는 날이 있어도,
서먹서먹한 날이 있어도,
울고 싶은 날이 있어도
3일 후에는 분명
즐거운 날이 올거라고 생각해.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날에도
틀림없이 활짝 웃을 수 있을거야.

그 때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너무 예쁘기도 했지만,

미나미의 말에서

이거 진짜 중요하다! 고 생각했다.

서먹해져도 3일 후면 웃을 수 있다는 거.

다퉈도 금방 화해할 수 있는 사람.

둘에겐 어떤 추억과 의식이 있었을까.

(매일 밤 함께 홀짝이던 맥주, 세나의 피아노, 아이들 같은 장난?)



나도 20대때까진 동생과 자주 다투었다. 동생은 먼저 사과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말을 안하고도 잘 지냈다. 하지만 난 같이 지내면서 그런 불편한 공기를 못견디는 쪽이었다. 그래서 다툰 다음날 저녁이면 늘 떡볶이나 순대 같은 걸 사갔다. 쭈삣쭈삣 봉다리를 내밀며 “ 떡볶이,, 먹을 거야? “라고 물으면 동생이 쓱ㅡ 보고 같이 먹었다. 한 두 입 먹으면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내 화해 의식은 떡볶이었다.


동생이 같이 먹자는 내 제안을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아주 깊이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다툰 것보다 화해의 손길을 거부하는 게 훨씬 충격이 크니깐. 하지만 동생은 단 한번도 싫다거나 됐다고 하지 않고 함께 먹었다. 그리곤 곧 다시 얘기하고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 정도면 함께 하기 좋은 파트너다.

(물어보니 늘 내가 먼저 화해의 제스쳐를 취해서 본인이 먼저 사과하거나 잘 지내자거나 해야 할 이유를 못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간의 모든 걸 보상이라도 하듯, 이젠 시도 때도 없이 별것 아닌 것에도 미안해 한다^^)


좋은 사람이 있다면,

작은 의식을 함께 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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